새로운 맛을 발견하는 즐거움
이번 회차는 지금까지의 글을 보고 '쟤 저거, 집에서 손 하나 까딱 안하고 받아먹기만 하네.'라고 생각하실 분들께 하는 약간의 항변이다. 저도… 주방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부지런히 밥을 짓는 산이 손 하나 까딱하기 싫어할 때가 있으니, 그건 아침이다. 산은 아침에 일어나면 왠지 모르게 기력이 없는 탓에 침대에서 길게는 한 시간까지 누워 있는다. 그에 비해 나는 결혼하고 나서 어쩐지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어릴 때는 새벽 내내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 엄마나 아빠랑 싸우고, 대학생 때는 새벽 내내 술을 퍼 마시거나, 영화관 마감 알바가 끝나고 같이 일하는 친구들과 술과 밥을 먹고는 아침이 되어야 잠들곤 했던 내가 아침형 인간이라니. 요즘은 일찍은 11시, 늦게는 1시에 잠들고 6시에서 8시 사이에 일어난다. 혼자만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는 그 시간에 따라 신체의 리듬이 달라지는 걸까. 어린 시절에는 모두가 잠든 밤이었고, 혼자 살 때는 뒤죽박죽이다가, 결혼 후에는 산이 일어나기 전 아침. 지금의 리듬이 고요한 시간을 사수하려는 본능 때문인지, 점점 체력이 달려 일찍 잠들어버리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우리 집의 아침 담당은 자연스럽게 내가 되었다.
쌀과 김치를 매일 먹어줘야 하는 우리지만, 나는 그에 못지 않게 빵순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는 독일에 살고 있고, 독일은 빵이 주식인 나라. 독일의 빵 문화는 2014년에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그 다양성과 역사를 인정받고 있다. '독일 빵'이라고 불리는 종류만 해도 적게는 300가지, 많게는 3,000여 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을 여행하는 많은 독일인들의 불평은, 한국에서 파는 빵이 모두 너무 달다는 것이다. 이유 있는 불평이다. 독일 연방 농업·식품·향토부(Bundesministerium für Landwirtschaft, Ernährung und Heimat)에서 발행하는 독일 식품 관리 지침서에 따르면 독일 빵은 각각 10% 미만의 지방과 당류를 포함하여 만들어진다. 식사 빵으로 먹는 대부분의 독일 전통 빵은 곡물, 소금, 물, 발효종만으로 만들어져 달지 않고 담백하거나 오히려 사워도우의 시큼한 맛이 난다. 게다가 일반 밀가루 뿐만 아니라 호밀이나 통밀의 함량이 높은 빵이 많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 판매하는 빵은 대부분 일반 밀가루를 사용하고, 버터나 우유, 설탕을 많이 사용해 단맛이 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가 유럽 여행 중에 쌀밥과 김치, 얼큰한 국물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아시아 여행을 즐기는 독일인들도 담백한 독일 빵을 그리워한다.
달달하고 부드러운 빵에 익숙해진 한국인들이 독일 빵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나와 산은 담백하고 거친 독일 빵을 좋아한다. 독일에 오자마자 슈퍼에 있는 다양한 빵을 시도해 봤다. 어떤 빵들은 시큼한 맛이 너무 강했고, 어떤 빵들은 너무 퍽퍽했다. 그런데 점점 그 맛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요즘은 어떤 빵이든 맛있게 잘 먹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아침은 보통 독일식이다. 빵과 치즈, 햄, 샐러드, 과일, 요거트, 견과류와 뮤즐리. 유럽의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독일은 한국에 비해 특히 과일과 채소가 저렴하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비싼 우유, 치즈, 버터 등의 유제품도 훨씬 좋은 품질에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다. 유럽에서 누릴 수 있는 몇 안되는 특권 중 하나다. 한국에서 과일을 싫어하던 나는 독일에서 매일 과일을 먹는데, 물론 저렴해서도 있지만 독일의 과일은 한국 과일에 비해 단맛이 적다. 그래서 독일의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단 걸 싫어하는 내게는 오히려 다양한 과일의 새콤한 맛을 즐길 수 있어 좋다.
초기에는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만들거나, 빵에 치즈, 살라미 등을 얹고 살짝 데운 뒤 샐러드나 과일을 곁들여 먹었다. 그런데 점점 그런 간단한 음식이 성에 차지 않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쓴 적 있지만, 나는 브런치를 정말 좋아한다. 여기서 브런치는 내가 이 글을 올리는 플랫폼 브런치가 아니라, breakfast와 lunch가 합쳐진 brunch. 거하게 먹는 서양식 아침 식사. (물론 플랫폼 브런치도 좋아합니다;)) 여행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조식 뷔페이고, 브런치 카페에서 판매하는 오픈 토스트나 에그 베네딕트 같은 메뉴는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나는 가난한 유학생이고, 매일 같이 조식 뷔페에 갈 수도, 브런치 카페에 갈 수도 없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집에서 그 분위기를 내는 것 뿐.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가 식당이나 카페에서 먹는 음식을 좋아하는 이유는 예쁘기 때문이다. 정성이 가득 담긴 플레이팅. 그리고 공간이 주는 분위기까지 더해지면 식사 시간이 더욱 즐거워진다.
물론 미술 애호가가 모두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아니듯이 나는 타고난 똥손이고, 내 플레이팅은 아무리 해도 어딘가 모자라다.
그래도 심혈을 기울이다 보면 얼핏 보기에 그럴싸해 보이는 비주얼이 나오기도 한다. 독일 빵뿐만 아니라 크로아상이나 베이글, 심지어 아시아마트에서 최근에 팔기 시작한 메론빵에 단팥빵까지, 종종 변화를 주고 있다.
한동안 슈퍼마켓에서 파는 제일 저렴한 빵과 치즈만 사던 우리는 점점 경험치를 넓혀갔다. 그건 친구들의 영향이었다. 베를린의 우리집을 처음으로 방문한 친구. 그가 오기 전에 우리는 분주했다. 어떻게든 특별한, 맛있는 걸 먹여야 한다는 의무감에 고민하던 중, 언젠가 베를린의 Top10 사워도우 빵 맛집을 소개한 기사를 읽고 구글맵에 몽땅 저장해두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독일의 빵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자우어타익(Sauerteig), 즉 사워도우(Sourdough)를 사용하는 빵이 많다. 저장해둔 빵집 중 하나가 당시에 아르바이트하던 까페의 옆옆옆집으로, 심지어 까페에 빵을 공급하던 빵집이었다. 베를린 곳곳에 지점이 있는 'Zeit für Brot'이라는, '빵을 위한 시간'이라는 뜻의 가게였다. 아침에 까페에 출근해 빵을 픽업하면서 그곳의 시그니처 중 하나인 'Hausbrot'을 샀다. 그 가게의 Hausbrot은 밀가루 베이스에 독일어로는 '딩켈(Dinkel)', 영어로는 '스펠트(Spelt)'라 불리는, 약 7,000~8,000년 전부터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지에서 재배된 밀의 고대종으로 만든 사워도우와 호밀을 섞어 만든 빵이다. 일반 밀가루 함량이 가장 높기 때문에 독일 빵 중에서도 입문하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750g에 7유로 가까이 하는, 슈퍼에서 파는 빵의 3배가 넘는 가격이었지만 손님 접대와 겸사겸사 빵을 맛볼 생각에 신이 났다.
거기에 또 인터넷에서 주워 들은 정보로 무화과 머스터드 잼까지 샀다. 결과는 대성공. Hausbrot은 겉부분인 크러스트는 바삭하고, 빵 안쪽은 부드럽고 고소해 무엇을 곁들여 먹어도 맛있었다. 그리고 무화과 머스터드 잼은 달달하면서 톡 쏘는 머스터드의 매운맛이 무화과 향과 절묘한 조화를 이뤄 난생 처음 먹어보는 신기한 맛이었는데, 중독성이 있었다. 알고보니 50년이 넘는 전통이 있는 제품이었다.
이 정직한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가격에 상응하는 맛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뒤로 나는 적정 가격의 경계를 좀더 적극적으로 허물고 새로운 맛으로의 탐험을 시작했다. 공산품 대신 시장에서 다양한 맛의 신선한 크림치즈를 사고, 슈퍼에서도 신선코너에서 에그샐러드나 올리브를 직원에게 직접 주문하고, 먹어보지 않은 치즈를 사면서.
이곳에서 나는 계속 나의 세상을 넓혀 간다. 학교에서 전혀 몰랐던 분야를 공부하고, 전혀 몰랐던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고, 전혀 몰랐던 맛을 알아간다. 종종 실패하기도 하고, 나의 한계를 알아가는 즐겁지 않은 일들도 닥치지만, 그래도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들.
앞으로도 나는 계속 새로운 걸 발견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을 더 많이 알아가면서 그 속의 작은 즐거움을 찾고 싶다. 돈이 많지 않아도, 빵 한 조각의 행복을 마음에 품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