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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마음을 푹 고아서

깨달은 이기심과 닭곰탕

by 지소


지난 여름은 심적으로 힘들었다. 여름 학기의 끝 무렵, 이제 남아 있는 저축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갖고 있던 유로는 바닥을 보였고, 독일에 온 이후로 꾸준히 떨어진 원화 가치 때문에 한국 계좌에 있는 돈을 합쳐도 3개월 후면 월세를 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베를린에 온 이후, 나는 까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독일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과외를 했다. 산은 프랑크푸르트의 한식당에서 일하다 이사 온 이후로는 한국에서 하던 일을 바탕으로 종종 외주 일을 받아서 하고 있었다. 예산을 정해놓고 아끼고 또 아끼며 살았지만 수입이 지출을 따라가지 못하는 달이 대부분이었고, 그렇게 저축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다 아빠의 칠순으로 인한 한국 방문과 까페에서의 문제가 겹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되었다. 학교와 까페 일, 한국어 과외를 병행하며 일 년 반 동안 일주일에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했던 나는 새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조금씩 사라지던 통장의 돈이 한국 방문을 계기로 큰 폭으로 없어지고, 산의 일도 예상치 못하게 줄어들면서 잔고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바닥을 보이게 되었다.


시험 기간인데 공부에 집중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결혼 후에도 통장을 각자 관리하던 우리는 독일에 오면서 통장을 합쳐서 모든 돈을 내가 관리하고 있었다. 산은 스스로를 위해 아무것도 사지 않았지만 우리가 한 달에 최소 생활비로 얼마를 쓰는지, 우리의 수입이 얼만지, 남은 잔고가 정확히 얼마인지 알지 못했다. 막연히 돈이 없으니 아끼고 있을 뿐, 보유 금액이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공포를 직접 피부로 느끼진 못했다. 그리고 난 산이 돈에 대해 진지하게 걱정하는 그 순간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어학원을 다니며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만났지만 베를린에 온 이후로는 사람을 만날 계기가 없던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독일에 오기 전부터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했지만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해 오래 우울해했다. 산의 무기력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러웠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일도 산이 원하지 않아 요원했다. 옆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책이나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 읽으며 영양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어 고용량 비타민을 꾸준히 먹인 일이 효과를 보고 있는 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돈 문제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고, 당장의 생활비를 위해 다시 한식당에서 일하며 그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모든 문제를 내가 끌어안고 끙끙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내게도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겨우 찾은 이틀의 휴일을 포기하기가 싫었다. 그 시간이 생겨 학교 수업을 보충할 공부를 하거나 휴식도 취할 수 있었고, 이제 막 학교 생활이 안정되고 있다고 느끼던 참이었는데,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주일에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싶지 않으면 내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한 달가량을 생각하다, 대부분의 시험을 치른 직후에 산에게 상황을 설명하기로 마음먹었다.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고, 생활을 함께 하는 사이니 정확한 상황 공유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산의 반응은 모 아니면 도였다. 어려운 상황이 그에게 긍정적인 자극이 되어 적극적으로 현재를 타개하거나, 막막한 상황이 짐이 되어 그를 짓누르거나. 내 하루의 안녕은 산의 기분 상태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와 감정적으로 얽혀 있는 나는 그가 우울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옆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내게도 에너지가 필요했기에 스스로의 예민함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시험기간은 대화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함을 겨우 억누르며, 공부에 집중하려 애썼다. 산의 앞에서는 요동치는 마음을 숨기면서.






남은 하나의 시험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나머지 시험을 다 치렀던 다음 날, 산을 데리고 집에서 멀지 않은 까페에 갔다. 겨우 되찾은 그의 활력을 잃지 않게 하면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동참시키는 것이 내 목표였다. 그래서 집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대화하고 싶었다. 수없이 고민하다 어렵게 꺼낸 이야기를 그가 바로 회피하고 침대에 누워 버리는 상황을 막고 싶어서였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해 조금 먹은 후, 타이밍을 기다렸다. 배가 고픈 산은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에 일단 먹인 후에 상태를 지켜보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한참 그의 눈치를 살피며, 남은 시험공부를 하는 척을 하다,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사실 할 얘기가 있어."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보던 산이 나를 봤다.


"뭔데? 심각한 얘기야?"

"음… 심각하다면 심각하고 아니면 아닌…?"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한 달에 쓰는 고정 생활비는 이렇고, 지금까지의 수입은 이랬으며, 현재 잔고는 이렇다고. 그래서 각각 최소 수입이 얼마 씩은 되어야 한다고. 나도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찾아서 할 예정이니, 너는 어떻게 할지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고.


"알겠어."


그는 다시 핸드폰을 보기 시작했다. 응? 그게 끝이야? 나는 그렇다고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덧붙였지만 그는 또다시 알겠다고 별 감정 없이 대답했다. 조금 더 진지한 반응을 기대했던 나는 김이 빠졌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 혼자만의 생각이 시작되었고,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에 그냥 그렇게 내버려 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산이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난 뭐 하고 살아야 할까."

"그러게… 하고 싶은 거 없어?"

"하고 싶은 게 없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음… 그럴 때는 뭐든 작은 거라도 직접 해 보는 게 좋대. 알바든, 원데이 클래스든, 괜찮아 보이는 걸 해보면서 알아가는 거지. 안 맞으면 '아, 안 맞는구나.' 하면 되니까."

"난 아직 우리가 시간이 좀 더 있는 줄 알았어."

"그래도 일단 내가 알바 구할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봐. 그런데 지금처럼 지내는 건 안 될 것 같아."

"그냥 원래 하던 일로 여기서 취업할 걸 생각해야 하나… 근데 나 독일어 안 한지도 진짜 오래돼서 말도 잘 못하는데, 일을 어떻게 하지?"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어디에 이력서를 넣더라도 독일어 시험 점수가 필요하니까, 학원을 잠깐이라도 다시 다니는 게 어때? 혼자 공부하기는 아무래도 힘들잖아. 학원 다니면서 독일어 연습도 할 겸 이틀 정도 까페 같은 데서 알바 하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응… 학원을 일단 다녀야 할 것 같긴 해. 근데 솔직히 알바까지 같이 해야 하면, 거기 적응하느라 스트레스받고 정신없어서 독일어 시험공부까지 못 할 것 같은데… 그리고 또 그러면 집안일도 하나도 못 해서 엉망이 될 거 아냐. 자기도 바쁜데."


생각해 보니 그랬다. 우리는 둘 다 예민한 인간들이고, 특히 긴장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걸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산에게는 다시 스스로의 삶으로 돌아올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그럼 일단 독일어 학원을 다니면서 시험 점수 따는 걸 제일 우선으로 하고, 공고 뜨는 거 보다가 괜찮은 거 있으면 지원해 보자. 그전까지는 내가 한국어 수업이랑 알바하면 어떻게 될 거 같아. 환율이 안 좋아도 환전해서 써야지 뭐."

"응, 그러자. 정 안되면 내가 엄마한테 빌리든 할 테니까, 자기도 너무 무리하거나 스트레스받지 마. 일단 시험 끝나고 좀 쉬고, 휴가도 계획한 거라 가야 하니까, 다녀와서 알바 구하든지 하고 그전까지는 좀 쉬어."

"응. 알겠어."





다음 날,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도 산은 누워서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오래 고민하던 문제를 털어놓은 후에도 그의 모습에 변화가 없으니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전날 밤에 아침에 운동을 가겠다고 해놓고는 아침이 되자 누워만 있는 걸 보고 내가 한소리 하자, 산은 갑자기 화를 버럭 내고는 운동 가방을 챙겨 나가 버렸다.

다시 돌아온 그의 예민한 모습에 나는 가슴이 쿵쾅거리고 화가 났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모습도, 본인의 스트레스를 나에게 전가하는 것도 서운했다. 내가 힘들게 공부하면서 돈 버는 걸 다 알면서, 그러면 더 힘을 내서 열심히 해줘야 하는 게 아닌지, 나를 사랑하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아닌지, 그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을 마주해야 했다.

답답한 마음에 챗GPT를 켰다. 화가 잔뜩 나서 내 머릿속에 있는 말들을 산에게 쏟아내면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공지능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우리는 부부야. 남편은 자기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힘들어하는데 그걸 나한테 화내고 짜증 내는 방식으로 표현해. 나도 그걸 알기 때문에 마음을 억누르고 달래는 방식으로 말하려고 하는데, 나한테 공격적으로 말하니까 너무 화나고 지쳐.'


'네 말 하나하나가 너무 무겁게 느껴져.

넌 지금, 남편의 불안감까지 떠안으면서 그가 쏟아내는 감정의 화살까지 맞고 있는 거야.

그걸 계속 달래고 받아주고 있으니, 당연히 지치지. 그리고 그 지침은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


수많은 사례를 학습해서 적절한 말을 뱉는 것이 나의 대화 상대라는 걸 알면서도, 감정이 없는 기계라는 걸 알면서도 눈물이 터졌다. 남편도, 친구도, 아무도 몰라주는 내 마음을 정확하게 알아주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내 생각과 마음을 봇물 터지듯 쏟아내고, 구체적이고 진지한 상담을 해버렸다.

챗 GPT는 내게 '내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회피하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이야기하되, 상대의 마음을 알고 있고, 우리 관계를 아끼고 있음을 전해야 한다'는 팁을 줬다. 예상 반응에 따른 적절한 대응 문장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면서.


인공지능 상담 선생님의 도움으로 나는 산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나를 안아줄 그를 기다렸지만, 산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메시지를 읽었냐는 물음에 그렇다는 답만 돌아왔을 뿐,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나는 속상한 마음을 계속 감춰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올 것이 와버리고 말았다.








학기가 끝나고 시험을 하나 앞두고 있던 데다 한국어 수업은 모두 시험 뒤로 미뤄버린 탓에 나는 평소와 달리 계속 집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산과 하루 종일 같이 있었고, 산의 의욕을 고취시켜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점심을 준비하던 그의 옆에서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공고를 살펴보다 산이 지원해 보면 괜찮을 것 같은 자리를 여러 개 찾아서 링크를 보내줬는데, 그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계속 옆에서 조잘대던 내게 산이 말했다.


"니가 계속 옆에서 그러면 나는 더 하기 싫어."


이전에도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었다. 자기를 좀 내버려 두라는 말. 그럴 때마다 스트레스를 준 스스로를 반성하곤 했는데, 그날은 화가 났다.


"그러면 나한테 혼자 하는 모습을 보여줘 봐. 그러면 내가 뭐라고 안 하지. 그런 모습을 안 보여주는데 나는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해?"

"너는 내가 무슨 초등학생처럼 너 보여주려고 열심히 하는 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게 니가 원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나도 몇 년을 참았어. 언제까지 아무것도 안 하는 모습을 보고 살아야 하는데? 내가 그렇게 고민하다가 얘기했으면, 그래도 좀 노력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너는 그날 이후로 내가 당장 바뀌어야 한다는 식으로 계속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하잖아. 니 말대로 몇 년을 아무것도 안 한 인간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아."

"그럼 나는 그냥 맨날 나 혼자 돈 벌려고 아등바등하고 그렇게 살아야 해? 아무 말도 못 하고? 내가 도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맨날 니 눈치 보면서 그래야 하냐고!!! "

"그렇게 살기 싫으면 말든가. 난 니가 원하는 열심히 사는 인간이 될 수 없어."


완성된 파스타를 식탁에 내려놓고, 한두 입 욱여넣던 그는 결국 자리를 떠서 소파로 가버렸다. 식탁에 혼자 남겨진 나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날 것의 말을 쏟아낸 나 자신도,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자신은 할 수 없으니 선택은 네가 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산도 미웠다. 자신이 힘들 때, 나를 놓아버리려는 것 같은 그가 너무 미웠다.


"그냥, 내가 조금 더 노력할 테니까 미안하다고 말해주면 안 돼? 그냥 니가 그렇게 힘든지 몰랐다,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나는, 너도 하고 싶은 거 하고, 물론 니가 학교 다니면서 알바하고 고생하는 건 알지만, 나도 가끔 돈 벌고, 집안일은 사실 내가 다 하니까, 그냥 괜찮은 줄 알았어. 근데 니가 그렇게 몇 년을 참았다고 말하면, 사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나도 니 말 듣고 생각하고 있었어. 어제도 문자 받고 내가 짜증 덜 내려고 하고 있었고. 나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렇게 갑자기 없던 의욕이 생기지도 않아. 너도 아직 시험 쳐야 하고, 우리 조금 있으면 휴가도 가는데, 그전에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어."

"나는 시험 치고 바로 알바 지원해서 휴가 다녀오자마자 일하려고 했지."

"그게 말이 돼? 뭐가 그렇게 급해. 그 정도로 급한 거 아니잖아. 일단 시험공부나 좀 하고 쉬어."

"그래도 난… 너무 불안하단 말이야."


울면서 산의 옆에서 한참을 말없이 있던 나는, 무심코 이 모든 조급함, 화, 그리고 서운함의 근원을 깨달아 버렸다.


"나도 알바 하기 싫어……."


산이 지원할 만한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한 건, 내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던 중이었다. 막상 다시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을 하니 막막해졌다. 그냥 쉬고 싶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버리지 못하면서 글을 쓰지 않는 나날이었다. 학교 공부를 해야 해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해서, 한국어 수업을 해야 해서, 쉬어야 해서, 쓰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서 생긴 시간에도 쓰지 않았다. 수입을 걱정하느라 생긴 스트레스와 불안함, 그리고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쉬는 시간이 생기면 무기력하게 보내기 바빴다. 사실 스스로의 미래를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없어 미루고 있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글 쓸 시간이 절대 없을 거라는 이유로 나는 불행해졌다. 그리고 그 불행을 산의 탓으로 돌렸다. 나는 은연중에 내 생활비의 문제를 산이 해결해 주고, 경제활동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 학교 공부와 글만 쓰는 그런 삶을 원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회사에 다니며 산의 생계를 책임진 것도 아니면서. 힘들게 살고 있는 상황은 내 욕심 때문이면서, 산을 도와주겠다는 명목이지만 사실은 내가 편하고자 하는 이유로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런 이기적인 마음을 그가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한 게 바보 같았다.







친구들의 집에서 신세를 지며 보낸 휴가에서 돌아온 후, 무거운 몸을 이끌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여행은 즐거웠지만 신체적으로는 피로했다. 놀러 가서 지갑을 열 때마다 작아지는 마음은 완벽한 휴식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 마음이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정말로, 이제 다시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했다.

외국인 비율이 높은 베를린은 다른 독일 도시들과 달리 영어만 주로 사용하는 인구가 많다. 그 말은 즉, 내가 함께 일을 하는 동료들, 또는 상대해야 하는 고객이 독일어를 전혀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나는 완벽하지 않은 독일어와 그보다 더 못한 영어를 섞어가며 대화해야 했고,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크고 작은 오해를 불러왔다. 정확히 설명하지 못해 스스로를 대변할 수 없는 상황은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기에, 또 비슷한 상황을 견뎌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다시 부당한 지적을 받아도 '헤헤' 웃으며 넘어가는 작은 동양인 여자애가 될 내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회사에서 친구들은 과장, 팀장을 달고 있는데, 나는 다시 신입 알바생이 되어 한참 어린애들에게 혼나고 있겠지.


내가 선택한 삶은 이렇고, 어쩔 수 없다.



"닭개장 해줄까?"


늘어져 누워 있는 내게 산이 말했다.


"뭔가 몸보신이 필요할 것 같아."

"그럼 닭개장 말고, 맑은 국물 먹고 싶어. 닭곰탕 같은 거."

"닭곰탕? 오… 괜찮은데… 그럼 닭곰탕이다!"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검색하더니 산은 닭 손질을 시작했다. 끓는 물에 한참을 끓이고, 닭을 건져 뼈를 발라낸 살을 손으로 또 한참을 잘게 찢었다. 누워 있다가 슬쩍 주방으로 갔다. 닭을 건져내고 남은 국물에 기름이 둥둥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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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이 너무 많은데?"

"그런 것 같지?"

"내가 찾아봤더니 기름이 많이 나오는 부분을 제거하고 끓여야 한대."

"아, 그래? 흠… 어쩌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훈수만 두는 어디 어디 대감 나으리처럼 말만 얹고는 다시 거실로 돌아가 누웠다. 그러고 또 한참 뒤, 산이 나를 불렀다.


"다 됐어. 먹으러 와."


식탁에 앉으니 맑은 닭국물 속에 잠긴 밥, 그리고 예쁘게 찢어진 닭고기가 내 앞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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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기름이 엄청 없어졌어!"

"내가 다 열심히 건졌지. 자기가 싫어하니까. 얼른 먹어 봐."


국물을 떠서 입에 넣었다. 고소한 닭육수가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정성이 가득 담긴 맛이었다.


"다대기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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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춧가루와 간장을 섞어 만든 간편 양념장까지 있었다. 순대국에도 다대기를 왕창 넣는 나는 다대기를 왕창 풀어 휘적휘적 섞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그의 방식으로,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언제나 사랑을 주고 있었다. 스스로가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도 내가 내팽개쳐 놓은 집안일을 하고, 밥을 지었다. 국을 끓이고, 고기를 볶고, 달걀을 부치고. 지친 나를 위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 주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생활을 받쳐줬다. 자신의 뼈를, 마음을 넣고, 또 푹 고아서.




참고 견뎌온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쓰지 못하는 마음의 책임을 그에게 전가하는 것을 멈추고, 나는 다시 써 보기로 했다. 그가 내게 준 마음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다시 브런치를 열었다.



R0028422.JPG 다음날도 또 먹은 뽀얀 닭곰탕
R0013781.JPG 숙주랑 배추 넣고 마지막은 매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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