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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만의 명절, 둘만의 전통

독일에서 보내는 우리의 명절

by 지소

명절에 집에 못 간지도 이제 4년 가까이 되어 간다. 어릴 때 나는 설날과 추석을 기다렸다. 매일 티격대는 친언니와 달리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촌 언니 오빠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과 반가움, 그리고 다정함이 좋았다. 학교도 쉬고, 용돈도 받고, 차례를 지낸 다음 낮잠도 마음껏 잘 수 있는 데다 화룡점정은 바로 명절 음식. 우리 가족은 보통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 아침이나 그 전날 밤에 할머니댁에 갔다. 할아버지는 형제 중 맏이였고, 그래서 '큰집'이었던 우리 집은 명절 전날 할머니, 엄마, 작은 엄마가 하루 종일 명절 음식을 했다. 가끔 튀김 재료에 밀가루를 묻히거나 거대한 소쿠리를 가져와 엄마 옆에 놓아주는 등 자잘하게 일손을 돕긴 했지만 엄마와 할머니는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시켰는데 내가 안 한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시집가면 어차피 많이 할 텐데 지금이라도 놀아라'는 말과 함께 그걸 용인했다. 그러니 나는 튀김옷을 입은 새우가 달궈진 기름에 떨어지며 나는 경쾌한 소리를 포착하고 주위를 맴돌다가, 완성된 새우튀김이 체에서 걸러져 달력 종이를 깔아 놓은 소쿠리에 담기는 즉시, 다음 날 차례상과 가족들이 먹을 수 있는 양 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입천장을 데면서 왕창 먹고는 할아버지가 우릴 위해 구입한 노래방 기계의 반주와 함께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면 그만이었다.



IMG_6044.jpeg 먹지 못 할 때까지 왕창 먹던 새우튀김과 고구마튀김



한 해 한 해가 흐를수록 명절의 흥겨움은 점차 사라졌다. 언니 오빠들은 하나 둘 명절에 가족들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생겼고, 머리가 커버린 나는 더 이상 쩌렁쩌렁하게 혼자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 할머니댁으로 가는 차 안에서 언니 오빠들처럼 나도 명절에 굳이 시간을 내서 내려오지 않겠다고 했다가 근 10년 만에 처음으로 아빠의 호랑이 얼굴과 고성을 마주하고, 어린애처럼 혼이 나야 했다. 주말에 할머니댁에 가지 않고 집에서 쉬고 싶다고 했다가 웬 고속도로 다리 한복판에서 차에서 끌어내려졌던 열 살 무렵의 그날처럼.


결혼 후, 사정은 더 나빠졌다. 엉겁결에 며느리라는 역할이 인생에 추가된 건 고작 만 스물여섯 때였다. 한복을 입고 얌전히 앉아 있던 첫 명절이 지나고 두 번째 명절에 시어머니가 해사한 얼굴로 가져다 주신 앞치마를 보았을 때, 나는 이 땅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그때 산은 시아버지와 함께 큰집의 소파에 앉아 오랜만에 만난 자신의 삼촌과 사촌 형과 함께 안부를 주고받고 있었다. 손자와 손녀를 차별 없이 대하던 할아버지 옆에서 우리 집 조상님들께 절을 올리고 남자들과 같은 상에서 제수 음식으로 밥을 먹던 나는 이제 다른 집 주방에서 앞치마를 입고 절하는 남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들과 다른 상에서 여자들끼리 밥을 먹어야 했다. 우리 집안 남자들과 결혼한 다른 여자들처럼.


당연히 시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주처럼 앉아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 내가 다른 남자들과 같은 위치였을 때, 작은 집 당숙들과 결혼한 어린 숙모들이 우리 할머니댁 부엌에서 이런저런 시중을 들고 남자들이 배를 다 채운 다음 일어난 자리에서 여자들끼리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그래도 작은 집 식구들은 명절 당일에 잠깐 고생하면 되니 전날부터 내내 음식을 한 할머니, 엄마, 작은 엄마보다는 훨씬 편하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엄연히 그들과 비슷한 입장이었다. 산의 식구들도 명절 당일 아침에 큰아버지댁에 모여 차례를 지내고 밥을 먹은 뒤, 정오가 조금 넘으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곤 했기 때문이다. 고작 몇 시간 며느리 중에서도 가장 편한 작은집 며느리 역할을 했을 뿐인데, 나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불편한 기분에 아주 오래 사로잡혀야 했다. 달라진 건 고작 하나였다. 결혼. 산과 함께하겠다는 약속의 결과로 비록 명절 한정일지라도 산은 양반집 자제, 나는 그 집의 시종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결혼 전에는 아씨였던 내가.


명절이 지난 뒤, 우리는 미친 듯이 싸웠다. 내가 부엌에서 일하는데 너는 왜 소파에 편하게 앉아 있어? 왜 내가 거기서 불편하게 밥 먹는데 너는 나한테 와보지도 않고 편하게 남자들끼리 밥 먹고 있어? 내가 가장 서운했던 것은 산이 그 몇 시간 동안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쭈뼛거리며 며느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때, 산은 나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친척들과의 대화에 열중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집 당숙들은 낯선 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들의 아내를 안타깝게 바라보거나, 가끔 옆에 와서 괜찮은지 물어보는 성의를 보였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한 말은 문득 주방으로 와서 큰 소리로 말한 "잘하고 있어?"였다. 나에게 묻는 건지, 시어머니에게 묻는 건지 알 수 없는 말. 내가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전제된 그 말.


그럼 그 상황에서 본인이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공주님처럼 대했어야 했냐고, 그러면 오히려 어른들이 안 좋게 본다고, 자기도 우리 집에 내려가서 힘들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소리쳤다.


"너는 우리 집에 가자마자 우리 엄마가 앞치마 줬어? 앞치마 받았냐고!!!!!!!!!"






그 이후로도 이어진 몇 번의 명절은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내려놓으려 애썼다. 나는 여자라서 부엌일을 돕는 게 아니라, 가족이 된 어른들을 위해 손아랫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거다, 어른들이 일하시는데 내가 앉아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일손을 보태는 거다,라는 생각을 우선했다. 산이 소파에 앉아 있지 않고 함께 이것저것 나르는 것만으로도 시종이 된 것 같은 기분은 많이 옅어졌다. 앞치마는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내 옷을 버리지 말라고 주시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하지 않았다.


명절의 고충을 나만 겪는 건 아니었다. 명절 당일에 잠깐 큰집에 들른 후, 남은 연휴 기간 동안 부모님과 해외여행을 가곤 하던 산은 언제나 공항에 가던 시간에 평생 해본 적 없던 귀성길에 올라야 했다. 나는 서울에 있는 시부모님 댁에서 단 한 번도 하룻밤을 보낸 적이 없었지만, 산은 처갓댁에 갈 때마다 하루 또는 이틀을 묵어야 했다. 엄마를 필두로 안부인사를 외모지적으로 시작하는 경상도 사람들인 내 가족들은 오랜만에 본 (조카) 사위에게 왜 이렇게 말랐냐, 피부가 더 안 좋아졌네, 따위의 말을 쉴 새 없이 던졌고, 원래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도 그들의 말을 멈출 순 없었다. 게다가 언제나처럼 누군가에게 바라는 모습이 명확하게 있는 엄마는 산이 본인이 바라는 사위 상에 부합하지 않을 때마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듯이 허리를 똑바로 펴고 앉으라거나, 눈을 보고 말하라거나, 하는 말을 쏟아내서 옆에 있는 나를 질색팔색하게 만들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고 정말로 아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들이 없는 마음에 사위를 며느리라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엄마의 그런 모습을 싫어하면서도, 나는 은연중에 산이 엄마의 기대를 맞춰 주길 바랐다.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엄마가 바라는 '싹싹한 사위'의 모습을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해 주길 바랐다. 집에 내려갔다 오면 그러지 않는 산에게 은근한 불만이 쌓였고, 그 마음이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온 어느 날, 산이 말했다.


"나는 너한테 우리 집에서 어떻게 해달라는 말 한 적 없고, 니가 그러길 바라지도 않아. 근데 왜 너는 니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계속 나를 바꾸려고 해?"


그 말을 듣고 머리가 멍했다. 나는 내가 가장 싫어하던 엄마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고 언제나 남의 시선에서, 본인의 기준에서 나를 판단하던 모습.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말하던 모습. 나도 버거웠던 그 일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시키고 있었다. 엄마가 말하던 것과 똑같이. '네가 다른 사람한테 잘 보이면 좋으니까.', '네가 우리 엄마한테 잘 보이면 좋으니까.'


산에게 울면서 사과하고, 그 이후로 산을 엄마가 원하는 사위로 만드는 걸 그만뒀다.






독일에 온 이후, 우리를 괴롭히던 이 모든 명절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우리는 돈도 시간도 없어 명절마다 한국에 가지 못한다. 단 하나의 의무, 양가에 영상통화를 한번씩 마치고 나면 오롯이 우리만의 명절을 즐길 수 있다.


명절을 기다리던 아이 때부터 명절이 싫어진 어른이 된 후까지, 내가 단 한 번도 싫어한 적 없던 건 명절 음식이었다. 여성들의 땀과 한숨이 섞인 그 음식을 나는 언제나 염치없이 좋아했다. 할머니가 굽은 허리로 쪼그려 앉아 한 솥 가득 끓이던, 해물과 두부와 무, 곤약이 듬뿍 들어간 탕국, 엄마와 작은 엄마가 기름 냄새를 맡으며 내내 튀기고 지지던, 바다와 땅에서 온 재료들.


땀과 한숨 없이 누리던 그 즐거움을 이어가기로 했다. 독일에서 맞이하는 첫 추석, 우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같은 어학원에 다니던 한국 친구들을 초대해 같이 동그랑땡과 송편을 만들었다. 그리고 냉동 해물믹스와 어묵, 두부를 넣은 탕국도 만들었다. 남은 두부로 두부전을, 남은 동그랑땡 반죽을 파드론 고추(Pimientos de Padrón, 스페인이 원산지인 고추로, 독일에서는 구워 먹는 고추라는 의미로 Bratpaprika라고 부른다.)에 넣어 고추전을 만들어 나름 세 종류를 완성했다. 어설픈 송편은 미묘한 맛이 났지만 전과 탕국은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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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의 첫 명절 음식. 막걸리까지 함께!


베를린에 온 이후에도 우리는 명절이 되면 음식을 만들었다. 산은 쇠고기가 든 탕국을 먹으며 자랐지만, 오롯이 해물만 들어간 탕국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해물 탕국을 끓였다. 동그랑땡을 왕창 빚고, 고추전도 언제나 함께였다. 카누를 함께하기도 한 한국인 선 언니가 오스트리아 빈으로 교환학생을 떠나기 전에는 동태전에, 육전에, 잡채까지 만들어 한층 더 명절 분위기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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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태전에 육전까지 도전:)


선 언니가 떠난 후, 우리는 다시 명절을 둘이서 보내야 했다. 시험기간에, 까페 아르바이트로 바빠서 같이 명절음식을 만들 시간이 없었던 올해 설에는 산이 혼자 몇 가지 나물을 무치고 탕국을 끓여 비빔밥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얼마 전 추석을 맞았다.


"이번 추석 때 나 딱 쉬는데, 동그랑땡 할까?"

"흠, 아니? 이번 추석은 노땡 추석이다."

"엥? 왜??? 예쓰땡 추석 해야지!!!"

"이번 추석은 노땡 추석으로 선언하노라."

"안 돼!!! 예쓰땡 추석!!!!! 동그랑땡 딱 명절 때만 해 먹는데, 그걸 안 한다고? 내가 동그랑땡 먹고 싶어서 명절만 기다리는데?"






결국 내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올해도 동그랑땡을 만들었다. 명절 음식은 손 크게 많이 하는 게 맛이니까, 다짐육 1kg을 사서 빚고, 먹을 만큼 구운 다음 나머지는 차곡차곡 쌓아 냉동실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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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러고 보니 원래 우리 집에서는 동그랑땡 안 해."

"그래? 우린 큰집에서 만들었는데."

"응. 우리는 동그랑땡 안 만들고 떡갈비 같은 냉동 사서 부치기만 했어. 우리 집은 동그랗고 넓은 전도 안 부쳐. 튀김을 많이 해서. 근데 외갓집에 가면 동그랑땡이 있었어. 우리 외할머니가 딸만 여섯이었잖아. 그래서 큰이모가 음식을 엄청 많이 해서 가져오셨어. 동생 가족들이 오면 같이 먹어야 하니까. 내가 그 동그랑땡을 좋아했거든. 엄청 맛있었어."

"오호, 그랬구나."


독일에서 시작된 우리 둘만의 명절 음식. 그건 어느 한 집안만의 전통을 따른 게 아니었다. 내가 며느리로서 산의 가족에 흡수되어 버린 것도, 산이 사위로서 입맛을 바꿔버린 것도 아닌, 우리 둘이 가족으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새롭게 만들어낸 전통. 얼마나 많은 가족에게서 물려받았는 지도 모르는, 그렇지만 우리 것이 되어버린 그런 전통. 서로에게 바라는 마음보다, 그저 함께 열심히 만든 음식을 같이 먹으며 웃는 그런 마음.


명절에 오지 않는 자식 때문에 우리의 부모님은 쓸쓸하겠지만, 나는 다시 명절이 좋아졌다. 멀어진 물리적 거리감은 오히려 마음의 거리감을 좁히고, 그들에 대한 미움을 옅어지게 한다. 둘 만의 명절에, 우리 둘 만의 전통과 한없이 이어진 그들을, 그들의 사랑을 나는 오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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