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다리/무릎/골반/손/팔/어깨
“발이 땅에 깊이 뿌리내릴수록 안정감은 커진다. 커지고 커진 안정감은 우리 삶에 깊은 만족(滿足)을 선사한다. 발(足)이 땅과 하나가 되어 세상에 가득(滿)할 때, 나의 세계는 모든 곳이 되고, 나는 모든 것이 된다.”
발은 나무의 뿌리와 비교될 수 있다. 나무의 뿌리가 깊을수록 더 많은 땅의 자양분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발은 대지 위에 단단히 섬으로써 삶의 에너지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몸은 여기에 실제로 존재하는 근간이며 발은 몸의 뿌리이다. 우리는 어머니 대지로부터 왔으며 발을 통해서 땅과 접촉하며 그 위를 서거나 걷는다.
‘땅과의 접촉(grounding)’은 단지 발이 물리적으로 바닥에 닿아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발을 통한 ‘땅과의 접촉’은 근원적인 연결을 의미하며 실존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있는 그대로의 나’가 만나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무대에서 삶을 생생히 경험하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땅에 연결되어 있고 중력에 일치할 때, 그때 땅은 스스로 우리를 곧추세운다.
발을 통해 땅과의 접촉을 잃은 사람은 방향 감각을 잃은 채 허둥지둥 달려가는 불안한 존재가 되고 만다. 그는 발밑을 살피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며 현실 도피적인 허황한 정신세계의 아성을 구축한다. 그 결과 세상과의 단절은 물론 참된 자기 자신과의 접촉도 단절되고 만다.
궁극적으로 ‘땅과의 접촉(grounding)’이란 자신과 지구 사이의 에너지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그 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연과의 유대감의 토대이다. 이런 깊은 유대감을 통해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일어나며, 이해는 더 깊이 세계에 대한 진실에 다가서게 만든다. 세계는 존재계의 그물 속에 서로 기대어 공존하며 펼치는 끝없는 역동임을 알게 된다.
여기에 ‘따로 존재하는 나’는 없으며 모든 것이 나의 일부이며 나 또한 나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내가 모든 것으로서 존재할 때 나는 이 세계에 온전히 받아들여진 것이며 그런 존재로서 느끼는 감정이 바로 만족(滿足)감이다. 만족이란 발(足)이 땅과 하나가 되어 세상에 가득(滿)하다는 말이다.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땅의 이치, 접지에 관한 개념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수행 체계에서, 특히 궁도, 합기도, 검도 등의 무예에서는 필수적인 가르침이 되어왔다. 일본 센고쿠(戰國) 말기 최고의 검객으로 꼽히던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한 이야기를 썼던 이노우에 다케히코도 그 책에서 한 스승이 제자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대목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땅의 힘을 모르고 제 팔에만 힘을 줄수록 검(劍)의 이치와는 멀어져 간다.”
접지를 깨달은 독일인 이야기
헤리겔(Eugen Herrigel)이라는 독일인 교수가 있었다. 그는 선(禪)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내용 중에 궁술이 선(禪)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였다. 붓다가 결가부좌를 하고 고요히 앉아 참선(參禪)하는 것은 완벽하게 보이지만 궁수나 검객의 일이 선(禪)일 수 있다는 사실은 믿을 수가 없었다.
헤리겔은 직접 일본으로 가서 그 비밀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도장에 머물면서 스승으로부터 궁술을 배웠고 마침내 백발백중 과녁을 꿰뚫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스승은 “그게 아니야, 핵심은 과녁에 있지 않아! 그것은 자네 안에 있네. 자네는 땅에 연결되어 있는가?”라고 말했다.
헤리겔은 대답했다. “서양에서도 수백 년간 궁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아무도 땅과의 연결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땅과의 연결이 뭐죠?” 스승이 말하기를 “땅과의 연결이란 자네가 땅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을 말하네. 그리고 땅의 힘이 자네 안에서 흐르도록 허락하는 일이지. 하복부(단전; 丹田)에 에너지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하네.”
그러자 헤리겔이 물었다. “그게 궁술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저는 과녁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스승이 말했다. “과녁에 대해선 잊어버리게. 우선 땅과의 연결을 느끼도록 해보게. 그리고 활을 쏠 때 과녁을 맞히려는 마음을 내려놓게. 활을 쏘는 것은 자네가 아니라 땅의 힘일세.” 헤리겔이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이상한 상황을 만드시는군요. 제가 활을 쏘아야지요. 어떻게 땅의 힘이 활을 쏠 수가 있습니까?”
그러기를 3년, 헤리겔은 단 한 번도 과녁을 놓치지 않는 궁술의 달인이 되었지만, 그의 스승은 “그게 아니야, 자넨 여전히 놓치고 있어! 나는 자네의 과녁을 지켜보고 있지 않아. 누가 자네의 과녁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나는 ‘자네’를 지켜보고 있네. ‘자네’가 바로 과녁일세.”라고 만 말했다.
결국, 헤리겔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가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저를 미치게 만드시네요. 밤낮으로 저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습니다.” 스승은 말했다. “그것이 내가 계속 말해오고 있는 것이네.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지 말고 그것이 일어나도록 허용하게. 단지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게. 그래서 그 일이 그냥 일어나도록 말일세.”
헤리겔은 독일로 돌아가기로 했다. ‘3년이면 충분하다. 스승님은 단 한 번도 좋다고 말하지 않았고 항상 “자네는 놓치고 있네!”라고만 말한다.’ 그는 매일같이 수련했으나 매일같이 실패했다. 그는 스승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가르침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내일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아침 하직 인사하러 오겠습니다.”
다음 날, 스승은 다른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헤리겔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그는 활쏘기를 포기했다. 그래서 그는 편안하게 앉아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스승을 지켜보았다. 왜냐하면, 스승은 새로운 제자에게 시범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갑자기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승은 매우 이완되어 있었다. 활을 쏘는 것은 그의 손이 아니었다. 내면의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이 너무도 명백했다. 즉시 헤리겔은 일어나서 스승에게로 갔다. 그리고 활을 쐈다.
스승이 말했다. “바로 그것일세! 자네의 득도를 이제 인가(印可)하네. 자네는 지금까지 긴장된 마음으로 노력하고 있었네. 그러나 오늘 이 일이 우연히 일어났는데 그것은 자네가 이것은 이제는 자네의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단지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게지. 자네의 눈은 명료했고 자네의 내면은 고요했네. 자네는 깊은 평화와 침묵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기에 이것을 볼 수 있었네. 3년 동안 나는 자네에게 이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지만, 자네는 너무 서둘렀기 때문에 볼 수 없었지. 빨리 배워서 독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없었던 게야. 자네는 궁술뿐만 아니라 땅과의 연결도 이루었네. 자네의 몸이 땅의 힘을 받아들일 때, 그 순간 자네는 땅에 깊이 뿌리 내려 땅과 하나가 된 것이지.”
다리는 개인의 독립, 자신감, 목표 달성을 위한 실행, 의지의 현실화라는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다리가 몸을 견고하게 지지하고 있다면 현실적인 실현목표를 향해 자신 있게 나아갈 준비가 된 것이다. 그 사람은 현실에 대한 좋은 감각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다리가 떨린다거나 허공에 뜬 것처럼 불안정하면 기둥이 흔들리는 집과도 같아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나아갈 수 없고 현재 필요한 행동을 실천할 수 없다. 실현이 가능한 계획을 세웠다고 할지라도 망설이다가 덮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견고한 기립은 우리에게 자신감과 안정의 느낌을 준다.
이제 막 일어서려고 하는 어린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심리적 압박이나 외적인 도움 없이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때 아이는 균형 잡힌 걸음걸이를 서서히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아이의 부모는 너무 서둘러 아이를 일어서게 만들려고 하고 걷게 만들려고 한다. 이때 아이는 심리적으로 압박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올바로 지지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낀다. 아이는 삶을 힘겨운 투쟁과 노력이라고 느끼게 된다.
일어서기와 걷기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심리적으로도 깊은 개연성이 있으므로, 정신적인 또는 감정적인 균형을 위해서 절대로 아이를 빨리 일어서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아이는 자신의 필요와 성장의 과정에 알맞게 스스로 움직이도록 놔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성장 후 요통에 시달리게 된다. 충분히 근육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의 손에 끌려 일어서고 걷는 것은 다리뿐만 아니라 허리에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준다. 티베트 사람에게는 허리 관련 질환이 드문 데, 그들은 아이를 일찍 일으켜 세우거나 걷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는 스스로 몸을 뒤척이거나 바동대면서 허리와 복부의 근육을 충분히 단련시킨다. 이렇게 충분히 근육이 단련된 후에 아이는 자연스럽게 몸도 뒤집고 앉고 일어선다. 그리고 걷는다. 이 과정에서 아이마다 시차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몇 살에 일어나고 몇 살에 말하고 몇 살에 걷고 하는 식의 평균적 통계가 적용되어서도 안 된다(질환이 의심될 때는 당연히 병원 진단이 필요하다). 아이 고유의 신체 시계가 잘 작동할 수 있도록 장애물 정도만 제거해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최상의 ‘서기’는 서 있는 동안 몸과 마음이 이완되고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걸을 때 통일감과 유연함을 느끼는 것이다. 신체적 균형에서는 양쪽 다리에 동등한 체중이 실려야 한다. 또한, 두 다리가 중력의 방향(수직선)과 일치하며 서로 평행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지면을 향해 수직으로 하강하는 힘(작용)과 그것을 딛고 수직으로 상승하는 힘(반작용)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무릎은 허벅지와 종아리가 만나는 곳이다. 무릎은 허벅지와 종아리를 조화롭게 움직여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중추이다. 우리가 정한 삶의 목표에 다가가는 과정에는 숱한 난관과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즐비하다. 이때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뻣뻣하게 버티면 더 큰 어려움을 겪다가 오히려 완전히 꺾여버릴 수도 있다. 이 ‘뻣뻣한 버팀’ 속에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내포되어 있다. 굴복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감정은 무릎에 염증을 일으켜 상황회피와 도피의 구실이 되어준다.
변화무쌍한 현실의 삶에서 재빨리 달아나거나 강하게 맞서거나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릎이 경직되면 안 된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관점으로 인해 겸손하고 유연한 태도를 잃고 무릎은 경직된다. 부드럽게 다가가고 인정을 베풀고 이기심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무릎은 건강함을 유지할 것이다. 삶의 목표를 자존심과 연관 지어 야망 화(化)한다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경쟁이고 심리적 고행이 될 수밖에 없다.
무릎은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도 연관을 맺는다. 우리는 웅크려 복종과 패배를 드러내는 신호를 보낼 때 무릎을 꿇게 된다. 자신의 몸을 최대한 작게 만들어 상대와 대척점에 서 있던 나는 더 이상 여기에 없다는 신호이다. 자존심을 꺾는 것은 자신의 정신적 죽음을 뜻한다. 따라서 무릎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을 맺는다. 실제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거기에 압도될 때도 무릎은 떨리고 힘이 빠진다. 그리고 마침내 주저앉는다.
삶이 기쁨의 춤이 되기 위해서는 변화와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무릎을 구부려야 하며, 그래야 높이 점프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구부릴 수 없다면 도약할 수도 없다. 이리저리 쉽게 방향을 바꾸고 우아하게 걷고 때로는 재빨리 달릴 수 있다면 무릎은 건강하고 삶은 활기가 넘치게 된다.
“인간에 대한 모든 규제는 삶에 대한 강렬한 감각을 잇따른 혼란 속에 잃어버리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골반은 두 개의 장골과 좌골(궁둥뼈) 그리고 치골로 이루어져 있다. 구조적 관점에서 상체의 기반인 골반은 척추의 기저부인 천골(엉치뼈)와 강하게 밀착되어 엉덩이를 형성한다(천골은 엉덩이의 중심에 위치하지만, 해부학적으로는 골반 구조물에 포함되지 않고 척추 구조물에 속한다). 기능적으로는 상체와 하체의 중개자로서 역할 한다. 건강하고 유연한 골반의 기능은 생명력을 위해 필요하고, 몸의 다양한 움직임과 감정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골반과 관련된 가장 큰 쟁점은 우리의 성적 관심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사회와 종교는 오랫동안 생식기와 성적 표현에 무거운 금기를 가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문화권에서 여전히 성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강요하거나 그릇된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우를 범한다. 그런데도 전근대적인 맹목적 복종과 도덕적 조건화를 극복하기 위한 바람직한 시도들이 이어져 왔었다.
1800년대 후반에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프로이트가 성의 억압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고, 나아가 라이히는 《성 혁명(1936년)》이라는 저서를 통해 불안과 신경증의 근본적인 원인이 성적 억압에 있다고 한 프로이트의 견해에 동의하며 오르가즘(orgasm) 능력의 회복을 통한 신경증 치료를 주장했다. 게다가 사회경제적 억압에도 원인이 있다고 보고 그 구조적 변혁을 위해 성 정치학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아마 나 자신의 도덕성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지만,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찰과 경험은 사회 전체뿐만 아니라 각각 개인의 내적 삶 역시도 성적 관심이 그 중심에 놓여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 빌헬름 라이히
1948년에 발간된 킨제이 보고서(Kinsey Reports)는 성에 대한 대담한 공개적 담론의 서막이었다. 이후로 성은 우리의 삶에서 더욱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오래되고 무의식적인 - 특히 여성을 향한 - 죄책감이나 수치심 따위의 주홍글씨는 오늘날 점점 옅어지고 있음에도 생식기에는 여전히 복합적인 깊은 느낌들이 부과되어 있다.
신체의 이 부분에 금기를 부과하는 것은, 특히 스스로 종교적이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삶을 흑과 백으로 쪼개고 갈등하며, 자연이 혹은 신이 부여한 생명력과 창조의 원천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은 어떤 살아있는 존재의 삶의 힘 대부분을 비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실상 오래된 성적 금기는 대중(大衆)에 대한 사회적·정치적·종교적 통제에 불과하다(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성적으로 억압된 사람은 의존감과 불안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그들은 쉽게 통제될 수 있다. 게다가 죄의식까지 갖췄다면 금상첨화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정치와 종교가 결탁하여 벌여온 일이다).
예컨대, 인류 역사에서 성자나 위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사람이 거의 없다. 붓다는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 태어났고, 예수는 성교를 거치지 않고 동정녀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박혁거세는 심지어 알에서 태어났다. 이 신화들이 암시하는 것은 당연히 성적 터부(taboo)이며, 그 목적은 조직되어가는 국가나 종교에서 왕권이나 교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물론 그들 자신의 의도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태생부터 정상적인 성을 거치지 않은 특별한 존재이기에 대중에게 숭배받아야 마땅하다. 지배의 논리를 애꿎은 성에서 찾았다.
성을 통하지 않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No sex, no birth!).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그런데 그들은? 맙소사! 누구는 옆구리로, 누구는 무성생식으로, 누구는 알에서 태어났으니 이 얼마나 특별한가! 정상적인 성과 무관한 몇몇 특별한 사람들을 위해, 정상적인 성과 유관한 대다수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기꺼이 고해성사가 필요한 죄인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성은 억압되고 골반은 위축된다. 삶은 경직되고 활기를 잃는다.
골반은 통제와 내맡김의 자리이다. 통제가 의미하는 것은 긴장과 수축이다. 내맡김이 의미하는 것은 관조와 깊은 이완이다. 통제의 해제는 종종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거나 방종과 혼동된다. 그리고 내맡김(let-go)은 종종 체념과 복종과 혼동된다. 강렬한 성적 느낌을 내맡긴다는 것은 골반에 가두어 두고 있는 모든 억압된 감정 에너지의 해소를 의미한다.
라이히도 억압되어 고립된 에너지는 불안과 신경증을 유발하므로 이 에너지가 잘 흘러가게 두면(let-go) 불안과 신경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 억압된 에너지를 풀어주는 방법으로 강한 신체 자극과 더불어 건강한 섹스도 포함했다. 라이히에 따르면, 갇혀있던 에너지가 풀려나오면 그가 ‘오르가즘 반사(orgasm reflex)’라고 명명했던 자발적인 골반 반사작용도 수반할 수 있는데, 이때 오르가즘 같은 생체에너지 반응이 일어나게 되고, 억압된 생체에너지(오르곤)가 자유롭게 온몸으로 흐르기 시작하면 건강과 활력과 편안함 심지어 인간 본연의 기쁨까지도 회복하게 된다고 한다.
성적인 행동은 삶의 순수한 기쁨의 표현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이 세상으로 왔기 때문이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성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매우 많이 의존해 있다. 성이 침대 위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 이상이라는 것에 더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은 또한 샤워한다거나, 웃는다거나, 산책하면서 느끼는 그런 감각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들보다는 훨씬 강렬하다.
통제와 내맡김 사이의 균형을 배우는 것은 건강한 사회적 삶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개인의 역사에서 통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자기 통제는 배변 훈련부터 시작된다. 항문 조임근은 단지 18개월에서 24개월 사이에 기능하기 시작함에도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일부 부모들은 아이가 이보다 더 어릴 때부터 많은 압박을 준다. 내 아이는 뭐든 다른 아이보다 더 빨라야 한다. 아이들은 용변을 참는 것을 배운다. 그 결과로 많은 골반 근육과 허벅지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수축한다. 이런 성향은 나중에 모든 자기 통제의 상황에서 반복된다(좋은 행동, 자기 통제를 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어떤 냄새나 외설적인 소리, 가스, 눈물, 콧물, 침 등을 내보여선 안 된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자기 조절이라기보다는 심리적 압박을 수반한 과잉 통제가 일어난다. 가령, 많은 사람이 모인 실내에서 방귀를 뀌어 냄새가 나서 민폐를 끼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과 많은 사람 앞에서 방귀를 뀐 것이 치부를 들킨 것처럼, 수치스럽고 창피해서 몸 둘 바를 모르는 것과는 다르다.
음식의 섭취, 소화 그리고 배설의 물리적 행위는 지각, 숙고 그리고 표현 같은 감정적이고 지성적인 행위와 동등하다. 우리는 어떤 것을 소화해서 자기화하고 세상에 그것을 되돌려 준다. 자기 자신을 이완하고 내맡긴다는 것은 대부분 사람에게 매우 어려운 과정이다. 그러나 내맡김은 딱딱한 몸, 얕은 호흡, 항문 긴장과 수축한 골반이 정상적으로 되돌아가도록 작용한다.
신체적 관점에서 통제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골반의 근육과 허벅지 깊은 근육의 긴장을 제거해 조직이 부드럽게 이완됨을 의미한다. 심리적으로 말하자면 통제하지 않음은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받아들이는 것과 두려움 없이 위축되지 않고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손과 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우리를 세상과 접촉하게 해주는 것이다. 손과 팔은 외부 세계와 관계 맺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숲속의 나무에서 내려와 드넓은 초원을 바라보며 직립한 이래로 손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나무 사이를 이동하며 열매나 따 먹던 손은 도구를 사용하는 손으로, 나아가 도구를 만드는 손으로 변모했다. 그 과정에서 지능과 함께 손의 감각도 고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도구의 능숙한 제작과 사용능력 그리고 손에 접촉된 대상이 자신에게 유익한지 아닌지 즉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면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뇌 지도를 그렸던 캐나다의 의사 펜필드(Wilder Penfield)의 호문쿨루스(Homunculus)를 보면 손이 엄청나게 과장되어 있다. 이것은 뇌에서 손의 영역이 차지하는 비중을 묘사한 것인데, 외부의 대상과 가장 직접 맞닿는 부분이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관계 맺기는 눈으로 먼저 대상을 인지하고 그다음 그 대상으로 다가가서 팔을 뻗고 마지막에 손으로 만져보므로 이루어진다. 그런 다음 대상의 감촉을 느끼고 반응도 살피면서 이 관계의 지속 가능성을 확인한다. 우리는 자신과 세계 사이의 연결을 위해 끊임없이 팔과 손을 뻗는다.
어린아이들은 어떤 것을 계속 만지려는 욕구가 있다. 그들은 접촉을 통해서 바깥 세계에 관해서 탐구하고 배우고 관계 맺게 된다. 어린아이에게 세계는 낯설고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기에 대상접촉 의지가 가장 왕성한 시기이다(다른 영장류는 이 시기 이후로 호기심과 탐구심이 거의 작동하지 않지만, 인간은, 이 시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성인이 된 후에도 유지된다).
아이가 걸음마를 마친 후(물론 기어 다닐 수만 있어도 가능하지만) 손을 뻗어서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통제하려고 한다. 심지어는 “이것은 만지지 마라, 저것을 만져라.” 등 부모의 뜻대로 아이를 움직이려고 할지도 모른다. 이런 통제가 심하면 심할수록 아이는 타인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 서툴게 된다. 통제를 심하게 받은 아이는 신체적으로 어깨와 팔 그리고 손의 근육이 경직된다. 아이가 대상과 능동적으로 관계를 맺을수록 긍정적인 감성은 발달한다. 그러므로 아이의 자발성을 최대한 보장해줘야 한다(그렇다고 아이가 위험에 빠지도록 놔두라는 말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여전히 원숭이였다면 손은 훨씬 일찍 더 중대한 역할을 떠맡았을 것이다. 더 중대한 역할이란 다름 아닌 생존이다. 원숭이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어미의 털을 부여잡고 매달릴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것은 원숭이 새끼가 인간의 아기보다 훨씬 성숙한 상태로 태어나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아기는 매달릴 힘도 부족하고 딱히 매달릴만한 데도 없다. 엄마의 맨살 어디를 부여잡을 것인가? 멱살이라도 부여잡아야 하는가? 다행히도 아기는 엄마를 부여잡고 매달릴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무모한 시도를 하지 않는다. 다만 울음신호를 보낼 뿐이다. 손에 뭔가를 쥐여주면 겨우 잡았다 놨다 반복할 뿐이다.
유대감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사회적 동물들의 생존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어미의 젖에 의존하는 포유류에게서는 더욱 그러하다. 원숭이 새끼가 어미의 털을 단단히 부여잡을수록 생존율은 높아지고 아울러 어미와의 유대감도 강화되기 마련이다. 유대감이나 친밀함의 정도는 접촉의 빈도와 그 깊이에 달려있다. 그리고 접촉은 언제나 손으로부터 시작해 가슴의 중심에서 끝난다.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이 행동을 제재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이 순서를 따른다. 가령 어떤 사람이 동일한 공간에서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 관계 맺기를 시도할 경우, 곧바로 신체 접촉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 마디 인사말과 관심사를 말로 주고받으며 탐색전을 벌이다가 호감이 생겼다면 다음 만남에서 악수를 하게 될 것이고 그다음엔 어깨와 뺨이 살짝 맞닿는 포옹으로 발전할 것이다. 마지막엔 가슴과 가슴이 닿는 깊은 포옹으로 정점을 찍는다. 친밀할수록 신체 접촉의 면적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하지만 접촉의 밀도를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손과 팔이다.
관계 맺기의 한 극단에는 적대적 관계 맺기도 존재한다. 적대적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싸움을 준비하는 동작을 생각해보라. 좋은 예로 맨손 격투기를 들 수 있는데, 맨손 격투기의 기본자세는 종목을 불문하고 대동소이하다. 공격과 방어에 용이하도록 팔을 적당히 구부린 채로 손을 얼굴과 가슴 높이 정도로 들어 올리는 자세를 취한다. 레슬링이나 유도 등 타격 불가 종목과 권투와 태권도 등 타격 가능 종목의 차이는 주먹을 쥐었느냐 폈느냐일 뿐이다. 손과 팔의 자세를 통해 어떤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부정적이기는 해도 이 또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관계 맺기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정신적 상처를 주는 말싸움보다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싸움 후의 화해는 두 사람을 더 친밀한 관계로 만들기도 한다.
친밀하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은 상황에서 어느 정도 거리 두기를 원할 때는 팔짱을 낌으로써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아울러 자신의 가슴을 보호하는 태도를 보인다. 또한, 팔짱을 끼기는 어깨와 가슴을 과장해서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우월감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고, 최소한 동등한 지위에 있거나 숙이고 들어가지 않겠다는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낼 때도 사용된다. 반면 공손한 태도를 보여야 할 관계에서는 손을 가지런히 모아 상대방에게 잘 보이게끔 자신의 몸 앞에 두어 어깨를 위축시킨다.
팔과 손은 어떤 구체적인 일을 하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된다. 우리는 손으로 많은 일을 하게 된다. 손은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생활을 위해서 하게 되는 모든 행위와 관련을 맺고 있다. 설거지하기, 빨래하기, 청소하기와 같은 가사 노동에서부터 그림을 그린다든가 공예품을 만드는 등 예술적 창조 행위도 모두 손과 팔을 써서 행하는 것들이다.
팔과 손의 경직은 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만들어낸다. 그 깊은 원인은 어린 시절의 지나친 검열에 있다. 양육자의 지나친 검열은 팔과 손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수동적으로 만듦으로써 성장해서 자신이 능동적으로 행위를 하려고 할 때마다 이 행위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실수하는 것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을 갖게 되고, 그 결과 팔과 손이 경직되고 나약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것은 수동적 관계 맺기로 귀결된다. 타인에게 직접 피해를 주거나 폐를 끼치지는 않겠지만, 위축된 사회성으로 인해 형성된 부정적 자기 인식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타인을 위해(危害) 하거나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인터넷상의 범죄, 악의적 댓글 등). 아니면 아예 무관심한 태도를 보일 수도 있다.
*반려동물이 인간의 정서적 안정에 도움을 주는 이유는 인간의 털 있던 시절의 추억으로 되돌리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영장류는 상호 털 고르기를 정서적 유대감을 강화하고 힘의 서열에 따른 사회적 긴장 완화의 수단으로 발전시켰다. 털이 없어진 지금에도 그 습성은 우리의 유전자 속에 깊숙이 박혀 있어, 털 있는 대상을 보면 쓰다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태에 놓인다. 털 쓰다듬기의 생리적, 심리적 보상은 확실하다. 만짐을 당한 고양이도 갸릉갸릉 하겠지만 만진 사람도 스트레스 지수가 신속하게 떨어진다. 행복 호르몬의 하나로 불리는 옥시토신이 접촉을 통해 분비되기 때문이다. 영장류 집단이 사회적 안정을 위해 발전시킨 상호접촉 교류의 생리적 결과물인 옥시토신은 인간의 친밀한 상호접촉에도 여전히 유효하여 그의 마음에 정서적 안정감을 선사한다.
어깨는 해부학적으로 흉곽과 팔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일상적 움직임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담당한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감정도 흉곽을 지나 어깨를 거쳐 팔과 손의 동작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따라서 심리적으로는 감정과 표현 사이의 중계자 역할을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자신이 느낀 감정을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잘 표현하는 것이 어깨의 건강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무의식적인 감정억압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주로 인간관계를 통해 일어나기에, 그 관계에서 지위고하, 힘의 우열 등이 본능적으로 모니터링되며, 그에 따라 몸의 태도, 말투, 감정표현의 방식과 수위가 결정된다. 특히 어깨는 자신의 힘과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소이기에 위계에 관련된 감정표현에 깊이 관여한다. 자신보다 덩치가 큰 사람(또는 자신보다 사회적 신분 우위에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수축하며 다소곳한 태도를 보이고, 자신이 제압할 수 있는 상대라고 판단되면 어깨를 펴고 거만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린 시절의 양육환경이나 기질에 의해 감정표현이 지속해서 제한되면 어깨는 위축된다. 양육자로부터 지속해서 무시당하고 별 볼 일 없는 존재 취급당하면 어깨는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않는다. 좁고 약한 어깨를 지닌 사람은 자존감이 약하고 힘들면 쉽게 포기하며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를 회피하려는 성향을 지닌다.
어깨가 지나치게 발달한 사람은 자신감을 넘어선 오만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언제나 운전대를 쥐려고 하고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어깨가 뒤로 젖혀져 있는 경우에는 그 사람의 거만함과 공격적인 성향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관계에서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해서 방어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면 어깨는 마치 가슴의 상처를 보호하려는 듯이 앞쪽으로 둥그런 모양을 만들게 된다. 굽고 매달린 듯한 어깨를 가진 사람은 인생이 마치 무거운 짐인 것 같은 태도로 살아가게 된다. 자신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고 단념한 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또한, 어깨는 목과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작용하기도 한다. 위협을 느끼면 어깨는 올라가고 팔로 머리를 감싸 방어태세를 취한다. 예를 들어, 혼자서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자기 앞으로 뛰어나오면 우리의 어깨는 즉시로 위로 올라가고 목과 머리를 움츠리게 될 것이다. 이런 방어기제가 계속되어서 위로 올라간 어깨가 구조화되면 그 사람은 거의 항상 불안함을 느끼게 되고, 마치 옛날 중국의 기(杞) 나라 사람이 매일 하늘을 보면서 하늘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했다는 이야기처럼 그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자신의 두려움을 투사하려는 성향을 지니게 된다.
인간관계를 포함해서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지 않고 의도적인 노력이라고 느낀다면 그것 자체로 매우 큰 스트레스가 될 것이다. 지배하려는 사람도 지배당하는 사람도 어깨가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타인과 상호 수평적 우호 관계를 맺게 될 때, 어깨에 가해진 부하를 넘어 만족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