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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언 Jul 02. 2022

인문학적 요가 수업

세계는 아니띠야

세계를 관찰해보니 뭐 하나 불변하는 건 없지요. 꽃을 봐도 그렇고, 나무를 봐도 그렇고, 강이나 바다를 봐도 그러합니다. 나타났다가 잠시 머물렀다 사라집니다. 게다가 관찰하는 나도 매한가지입니다. 태어나서 늙어가며 병들고 마침내 죽습니다. 세계는 생(生) 주(住)멸(滅)하고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합니다. 비밀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문제의 근원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거기에 바로 '변화'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이 세계가 지도처럼 고정되어 있다면 문제의 소지(素地) 자체가 없는 게 되니까요. 세계에는 사실 명사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변화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도 이렇게 말했지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 느낌적 느낌으론 같은 강물에 두 번, 세 번 발 담그는 것 같은데 말이지요.


요가에서는 한 단어로 정리합니다. “अनित्य” 이게 뭐냐고요? “아니띠야(anitya)”라고 읽고, 무상(無常)이라고 씁니다. 인생무상할 때 그 무상입니다. 불교에서 일상으로 유입된 말 중 하나입니다. 남방 불교에서는 빨리(pāli) 어로 아닛짜(अनिच्च, anicca)라고 합니다. 여전히 불교 용어이기도 하고요. 요가수뜨라에도 나오는 용어로, 똑같이 무상(無常)으로 번역합니다. 


흔히 일상에서는 허망한 일을 겪거나 허무함을 느낄 때 쓰지만, 원래는 인생의 회한을 담은 감성적‧감상적 표현이 아니라,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처럼 단순히 현상을 표현한 말입니다. 무상, 말 그대로 늘 그대로인 것(常)은 없다(無)는 말입니다. 늘 그대로인 것을 뜻하는 nitya(नित्य)에 부정 접두어 a(अ)가 더해진 말입니다. *a(अ)는 문맥이나 말의 느낌에 따라 무(無), 부(否), 부/불(不), 비(非)로 번역됩니다.  


세상은 변하고 나도 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착각하며 변하지 않는다는 듯이 살아갑니다. 고정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이래야만 된다고 말하고 저래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럴수록 세상과 부딪치는 일은 늘어납니다. 


고통의 마일리지가 점점 쌓여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폭발합니다. 마일리지가 클수록 폭발력도 큽니다. 문제를 일으키고 사고를 치기도 합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행동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스스로 괴롭힙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끝난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 패턴은 일생을 두고 반복되는 게 다반사입니다. 오랫동안 이런 방식으로 길이 든 까닭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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