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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임은정 Oct 10. 2020

당구장 알바를 하게 될 줄이야

자유롭지 않은 자유


"머리 색깔 평범하신데요?"


당구장에 면접 가기 전, 혹시 머리 색깔이 밝아도 일할 수 있냐고 전화로 물어봤었다. 면접 때 사장님들 하시는 말씀이, 대체 얼마나 현란한 색깔이기에 그렇게 물어보나 했었단다. 무지개 색깔 정도 되는 줄 아셨나 보다. 내 머리 색깔이 당구장에서는 평범한 색깔이 될 수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노란 머리로 탈색한 후, 회사 취직할 생각은 아예 접었다. 예전에 여자 당구 선수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고, 당구를 배우며 일하고 싶어서 당구장 알바에 지원했다.


평범한(?) 노란 머리로 일할 수 있어서 좋았다. 보통의 회사라면 찢어진 바지가 튀는 복장이었을 텐데, 당구장에서 일하기엔 문제없는 복장이었다. 지금은 실내 흡연이 안 되지만 그 당시에는 가능했다. 노란 머리에 찢어진 바지를 입고 근무시간에 실내에서 담배 피울 수 있는 직장. 이보다 더 자유로운 직장은 없다고 생각했다. 두발 자유, 복장 자유, 흡연 자유.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했다.




제주도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뒤 집으로 돌아와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엄마께 친구들 만난다고 말씀드리고 나갔다. 친구들과 한참 술을 먹고 있는데 한 친구가 폰을 보더니 갑자기 말이 없어지길래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 친구가 망설이다가 문자를 보여줬다.


우리 딸이 지금 너를 만나러 간다고 나갔는데 같이 있는 거 맞니? 내가 문자 보냈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고.


제주도에서의 병원 생활로는 내 분노를 없애기엔 충분하지 않았는지, 엄마가 친구한테 보내신 문자를 보자마자 잠잠했던 분노가 다시 솟아났다. 격한 상태로 집에 들어가니 엄마가 내게 약 챙겨 먹었냐고 물어보셨다. 분명히 친구 만난다고 하고 나갔는데 왜 내 말을 못 믿고 애 취급하냐고, 왜 계속 환자 취급하냐며 소리 지르고 약을 바닥에 다 집어 던졌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카톡을 보냈다. 우리 엄마가 자꾸 내 말을 못 믿고 정신병자 취급을 하고 있다며, 내가 정말 비정상인 게 맞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내가 생각하기엔 엄마가 미친 것 같다며 사람들에게 엄마 욕을 했다. 다들 나보고 정상이라고 하는데 엄마만 나를 비정상으로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퇴근하고 집에 온 동생에게, 내가 비정상이냐고 물어봤다. 누가 봐도 제정신 아닌 누나에게 동생은 침착하게 말했다. 누나는 정상이라고. 다만 개성이 강할 뿐이라고. 이 세상에 비정상은 없다고. 다만 특별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동생의 말에 안심이 됐다. 고마웠고 기뻤다.


외래 진료받으러 가는 날이 되었다. 병원 갔다가 아는 동생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그런데 전 날 엄마에 대한 분노가 풀리지 않아서 방에서 안 나갔다. 엄마가 병원 가자고 문을 두드리셨지만 안 갈 거라고 했다. 잠시 뒤에 밖이 시끌시끌했다. 거실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어떤 남자가 방문을 두드리며 나오라고 소리쳤다. 계속 안 나오면 문을 강제로 따고 들어간다고 했다. 그래서 나갔더니 구급 대원들과 경찰들이 거실에 잔뜩 들어와 계셨다. 나를 끌고 가려고 하자 알아서 가겠다며 뿌리쳤다. 정상적인 사람 잡으려고 인력 낭비하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다.


이따가 만나기로 했던 동생에게 전화해서 병원 앞으로 와달라고 했고, 엄마가 나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하니까 네가 나를 도와달라고 했다. 구급 대원들과 함께 병원 앞에 도착한 내 모습을 보고 그 동생이 놀란 눈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사이였는데 그동안의 사연을 자세히 얘기할 틈도 없이 그 동생을 데리고 같이 상담실에 들어가면서 말했다.


"지금부터 말 한마디도 안 할 테니까 네가 의사 선생님께 나에 대해서 얘기해줘."


나와 그 동생, 그리고 엄마 이렇게 셋이서 상담실에 들어갔다. 이 모든 상황에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동생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의사에게 말했다.


"제가 알던 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흑흑"


눈물이 났다. 나를 비정상이라고 말하지 않아서 고마웠다. 그 동생이 의사에게 내 얘기를 좋게 해 줬으니 의사가 나를 정상으로 보겠거니 생각하고 안심했다. 그런데 의사가 어떤 신호를 주자 뒤에서 나타난 보안요원이 휠체어를 끌고 왔다. 나를 태워서 폐쇄병동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의사가 나랑 말 한마디도 안 해봤으면서 내 상태가 어떤 줄 알고 입원시키려 하는지, 왜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는데 휠체어를 태우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병원 로비를 지나면서, 이 보안요원이 정상적인 사람을 휠체어에 태워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며 온 힘을 다해 소리 질렀다.


그 동생은 폐쇄병동까지 따라와 줬지만 더는 도움 줄 수 없었고, 결국 모두가 기피하는 독방에 혼자 갇혔다. 폐쇄병동 자체가 폐쇄된 곳인데 독방은 그 안에서 가장 폐쇄된 곳이다. 작은 공간에 침대와 변기, 그리고 CCTV가 있다. 그 CCTV로 나를 관찰한다. 내가 갔던 독방은 그랬다. 아무도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며 소리를 계속 질러 댔다. 계속 문을 두드리며 난리 쳤다. 병원 직원들이 들어와서 내 팔다리를 각각 침대 모서리에 묶었다. 발버둥 쳤지만, 코끼리 주사를 맞고 또 기억을 잃었다. 일곱 번째 입원이었다.


감옥 같던 병원에서 퇴원 후에 하게 된 당구장 알바는 내게 자유를 줬다. 친구들이 다니는 회사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건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노란 머리로 일하는 건 자유였지만, 자라나는 머리카락 때문에 매번 뿌리염색으로 돈 써야 하고 머릿결도 상한다는 점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찢어진 바지 입고 일하는 건 자유였지만, 바지 입을 때 조심히 입지 않으면 다 찢어지기 때문에 주의해야 하는 점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실내에서 마음껏 담배 피우는 건 자유였지만 온종일 담배 연기로 가득 찬 곳에서 일하다 보니 온몸에 담배 냄새가 밴다는 점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진정한 자유를 찾기까지는 아직도 먼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 8:32 새 번역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John 8:32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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