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개월 아기와 함께한 네 번째 여행 | 자연, 한적함, 안정감
꼭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어도 각자의 마음속엔 ‘다시 찾고 싶은 곳’이 있기 마련이다. 그곳을 찾고 싶은 이유에 대해 물으면 다양한 사연을 들을 수 있고 사연 속에 충분히 묻어있는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다. 어떤 사람과 이제 막 관계를 시작하거나 알아가는 단계에서 이러한 질문은 그 사람의 철학이나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다시 찾고 싶은 여행지'로 국한하여 예를 들자면, 여행지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있거나 자신의 우선가치와 여행지의 테마(예를 들면, 식도락, 쇼핑, 트래킹, 다양한 문화체험 등)가 맞아서란 이유를 들 수 있겠다.
나에게 있어 '다시 찾고 싶은 곳' 중 하나는 홍콩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도시 자체가 지닌 이미지가 명확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도시공학을 전공해서인지 홍콩에서는 다양한 교통수단을 한 곳에서 모두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MTR, 버스, Ferry, 비행기, AEL, 트램 등 도시 내에 얽힌 교통망들을 경험하며 도시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었다. 또 기분 탓인진 모르겠지만 홍콩의 호텔의 선택 범위가 넓고 타국에 비해서 호텔비가 저렴한 편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Multi-cultural city라 음식의 선택 범위도 다양했고 여차하면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옵션이 즐비했던 점이 홍콩의 강점이라 생각했다.
업무 상 출장을 제외하고 약 10여 번의 홍콩 여행을 했다. 그중에는 주요 관광명소와 맛집들을 찾아다니는 것을 첫 시작으로 단순히 호텔에서 쉬며 주변 지역을 돌아보는데 만족하기도 했고, 마카오 일정까지 빡빡하게 스케줄을 소화한 적도 있다. 홍콩 도심 외곽 어촌마을에서 혼자 랍스터를 시켜 먹기도 했고 청자우 섬에서 트래킹을 즐기기도 했다. 가장 최근의 여행은 만삭의 아내와의 여행이었다. 곧 태어날 아이를 기념하며 손수 소품들을 제작해서 셀프 만삭 촬영을 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에게 있어 '야경', '딤섬', '쇼핑'이라는 키워드로 대변되었던 홍콩은 여행을 거듭할수록 키워드가 늘어나기도 하고, 다른 키워드로 대체되기도 했다. 요 몇 년 새 한 달 살기가 주요 관심사가 된 이유는 한 지역(또는 국가)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경험의 깊이를 다르게 가져가기 위함이 아닐까. 결국 나만의 키워드를 찾기 위해서.
영유아를 동반한 여행을 할 때는 한 번에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보다 잘 알고 있는 국가를 선택해 발생 가능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데 상당 부분 초점을 맞춘다. 그렇지 않다면 잘 알려진 휴양지나 이미 검증된 '아이와 가기 좋은 관광지' 등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나 역시 아이와의 여행이 오키나와-싱가포르-오사카-홍콩으로 네 번째인데, 여행 지역 선택과 관련한 사고 흐름은 다음과 같았다.
1st trip 오키나와 - 아기와의 첫 해외여행으로 검증된 휴양지 선택
2nd trip 싱가포르 - 중거리 비행에의 도전, 이에 적합한 동남아시아 기존 방문국
3rd trip 오사카 - 엄마 없이 아빠랑 아이랑만 가보기 도전, 기존 방문국 중 근거리
육아 휴직 후 버킷리스트 맨 상단에 위치한 ‘아이와 둘이 한 달 살아보기’. 어느 지역이 좋을지 리서치를 거듭하다가 홍콩 디스커버리베이가 눈에 띄었다. 10여 년 전 구입했던 여행 책자에서 우연히 발견한 문구가 큰 역할을 했다.
홍콩의 유일한 환경 도시로서 홍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택시나 개인 승용차를 이곳에서는 볼 수 없다
익숙한 홍콩. 그래 이번에 가족여행으로 짤막하게 다녀와 보자.
아이 동반 여행을 계획할 때 지역을 선정하는 논리는 개개인이 다르겠지만, 나는 '안전'과'자연'에 높은 가중치를 부여하는 편이다. ‘위험해', '그건 안돼 지지' 란 말을 뱉지 않을 수 있는 아무런 위험요소 없는 거대한 풀밭에서 한없이 뛰어놀게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아마도 많은 부모들이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도심 속에서 태어나 콘크리트 구조물과 인공물을 보며 자라는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노출시키고 싶다는 아빠의 욕심 때문일까. 안전망이 구축된 자연환경에서 맘껏 뛰놀게 두고 싶다는 내 생각은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번 여행지인 디스커버리베이(DB)는 나의 두 가지 중요 가치를 충분히 만족시켰던 곳이고,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한 달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으로 다가온 지역이었다. 글의 길이상 두 편으로 끊어 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되어 이번 편에서는 프롤로그와 '한적하고 여유로운 지역 분위기, 그리고 산책로와 안락한 노면'을 다음 편에서는 '자연환경_바다', '안전을 위한 디자인', '숙소 리뷰'를 적어보겠다.
이곳이 홍콩이 맞을까란 의문이 들 정도로 디스커버리 베이 지역은 한적한 분위기와 자연경관에 둘러싸여 있다. 홍콩 국제공항에서 약 20여 분 택시를 타고 오다 보면, 또 다른 세계에 들어가는 비밀 통로와 같은 Discovery Bay 터널을 지난다. 청명한 날씨도 한몫을 했는지 터널의 끝자락에서 펼쳐지는 경관의 첫인상은 어느 시골 마을의 주거단지에 온 느낌이었다.
개인 차량이나 택시의 통행이 없고, 전동 카트와 버스, 몇몇 승인된 공공 차량 만이 도로를 사용하다 보니 신호등도 없다. 주요 교차로는 Roundabout(로터리)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홍콩 침사추이에서 느낄 수 있는 익숙한 차량 매연 냄새가 이 곳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곳을 발견하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일은 유모차 펼치기다. 아이와 아내와 함께 이 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가장 먼저 앞선다.
가장 널찍한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양 옆으로 펼쳐지는 산과 바다 그리고 울창한 가로수 까지. 한번 숨을 훅 들이마시면 깔끔함이 느껴지는 이곳은 평지가 아니어서 더 유모차 산책이 좋았다. 지형 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반복되어 타고 있는 아이에게도 적절한 긴장감을 줄 수 있었다. 물론 아이는 산책 시작 몇 분과 동시에 편안했는지 잠들었지만 말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바뀐 것은 '노면 상태에 민감해졌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아무런 느낌 없이 지나칠 수 있었던 노면 상태. 걷는 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는 노면도 유모차를 잠깐 끌어보면 알게 된다. 이 지역의 노면 상태가 어떤지, 유모차를 편안히 잡고 끌 수 있는 노면인지 아니면 전방을 항상 주시하며 긴장하고 끌어야 하는지 말이다. 유모차를 끌며 침사추이의 거리를 다녀본 부모라면 바로 공감할 것이다. 몇 년 전, 강남의 보도블록을 교체하여 하이힐을 신고도 편안하게 다닐 수 있는 거리를 조성했던 것이 기억이 나는데, 이처럼 당사자가 되어야 체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상대방을 '배려'하고 '공감'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한번 알게 된다. 여하튼, 우리의 산책로는 자연을 즐기기에 충분한 노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촘촘히 박힌 블록과 주기적인 유지보수, 청결 상태, 넓은 보도 간격이 한 몫하지 않았나 싶다.
이 길 그대로 조깅 코스가 되기도 한다. 뛰고 싶게 만드는 코스여서 호텔에서 아이와 아내가 낮잠 자는 시간을 활용해 잠깐 뛰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보았다. 한동안 이 길을 감상하느라 Pacer를 켜는 것을 깜빡했지만 DB North - DB Plaza를 잇는 최단거리는 약 4~5km가량 되는 것 같았다. 중간중간 주거단지로 진입하는 샛길들이 있으나 들어가 볼 수 있는 곳도 있고, 사적 공간으로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입구에 붙어있는 경우도 있었다. 시간 관계상 DB를 내려다볼 수 있는 Look-out point에 가볼 수 없었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것으로.
* Discovering '디스커버리베이' 이야기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