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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Oct 27. 2020

너의 악몽을 내게 덜어줘

"어? 금호여인숙이네."

우리 집 화장실 문앞에 깔려있는 수건을 보고 친구가 말했다.

"금호?"

친구가 바닥의 수건을 가리켰다. 정말 수건에 '금호여인숙'이라고 적혀 있었다. 엄마가 여인숙에 들렀다가 몰래 가져왔던 것을 내가 아직까지도 쓰고 있었나? 엄마가 젊었을 때 가져온 수건을 내가 성인이 돼서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제주도에 내려오기 전에 아빠와 함께 여관에서 하룻밤 묵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가져온 것 같기도 했다. 어찌됐든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들여온 물건이 내 삶을 책임지는 나이가 되어서도 집에 남아있었다.


나를 지나쳐온 사람들을 생각하면 작은 여관 건물을 생각하게 된다. 102호, 203호 등등 방마다 방의 주인들이 있고, 방문을 열면 사람들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영화처럼 상영되는 느낌이다. 잊고 싶은 기억을 준 사람들은 금방 떠나고,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은 계속 남아있는 그런 여관.


어린 나이에 연애를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친한 언니가 말했다. 나는 소주를 들이키며 내 나이를 다시 확인했다. 자연이는 아직 스물여섯 살인데……. 그러게요. 잘 모르겠어요. 그러고 말았다.


나는 어떤 사람들을 만났을까.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인지는 무자르듯 나누기 어렵다. 굳이 범주화를 시키자면 잠을 잘 못 자는 사람이 많았다. 나와 비슷하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대부분 불면증을 앓았다. 나도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지만 이상하게 나는 영면수준으로 잠을 잘 잤다. 별명도 잠탱이, 잠순이 이런 게 아니라 영면공주 ...뭐 이런 식이었다. 여하튼 그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나를 지나쳐온 사람들처럼 상처를 거부하고 자신을 속여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하는데 나는 그런 일에 시큰둥하다. 슬픔이랑은 별개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다 떠남 말어. 잘 살어. 그러고 말게 되는 것이다. 그래놓고서 잠을 잘 못 자는 쪽은 나였다.


애정은 몇 초만에 생기는 것이고, 몇 초를 위해서 나는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다. 몇 초를 잊기 위해 아파할지, 몇 초를 더 기억하고 싶어서 앞으로 나아갈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잠을 잘 자라고 하고 싶다. 잠든 사람의 곁에서 향초에 불을 붙이는 행위를 해도 좋을 것 같다. 편안한 여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슬픔은 나한테 덜고 푹 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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