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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Oct 30. 2020

새끼

친구 집에 놀러 갔다. 그 애는 고등학생 때부터 나와 친했고, 내가 육지와 제주를 오가며 얼마나 고되게 살았는지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아이에 대해 잘 몰랐다. 내가 고등학생 때 울면서 통화를 할 때도 '자연아, 나도 똑같아.'라는 말이 끝이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로 나는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날은 정말 평범한 날이었는데, 어째서인지 그 아이가 잠들기 전에 자신의 얘기를 했다.


"난 진짜 살면서 돈 때문에 너무 지긋지긋하게 살았거든.  옷도 항상 싼 것만 입고 화장품 같은 것도 바닥 보이는 거 탈탈 털어서 쓰고…… 이러기 싫은데 그렇게 돼. 나는 진짜 애 낳으면 엄청 잘해줄 수 있어."

"진짜? 나는 자신 없는데."

"난 정말 자신 있어. 내가 어렸을 때 뭐 때문에 힘들었는지 기억하거든."


그 이후로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자식을 얻게 된다면 잘 키울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본다. 이성애자 친구든 퀴어 친구든 계획이 없더라도 어떤 생각인지 궁금했다. 놀랍게도 20대 친구들이 출산이나 입양 계획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키우는 일에는 꽤 자신 있어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N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비슷한 얘기 내 친구들이랑 한번 했었거든. 근데 졸라 웃긴 게 뭔지 알아? 다 자기는 잘 키울 거래. 어릴 때 부모한테 뭔가 아쉬움이나 결핍이 있었던 거지. 나는 아빠가 나한테 거짓말을 많이 해서 어른이 돼도 의심이 많아졌어. 내가 만약에 자식을 낳는다면 나 편하자고 거짓말은 절대 안 할 것 같아. "


나는 이상하게도 육아에 대한 자신은 없다. 엄마만큼 해낼 자신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기다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자식을 통제한다고 믿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새끼지만, 자식을 독립된 개체로 바라보는 듯했다.


여섯 살 때 생애 처음으로 설거지를 시도했다. 싱크대라는 관념을 없어서 그릇을 가져와서 화장실 세면대에서 그릇을 씻었다. 근데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화장실 바닥에 그릇 깨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자연 그릇 깼어요!"


작은 오빠는 그 현장을 목격하자마자 엄마한테 고자질을 했다. 나는 공포스러운 마음으로 엄마한테 찾아갔다. 그런데 엄마는 나를 혼내려고 하지도 않고, 가만히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날 도와주려고 그랬나 보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 느낀 안도감이 꽤 컸나 보다. 지금 돌아보면 엄마는 이미 내가 그릇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도 이미 보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자연이 정말 힘들게 살았구나. 근데 어쩜 이렇게 잘 컸지? 신기해."


가끔 가까운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나는 아픈 기억 좀 있다고 삐뚤어질 필요는 있나 싶다. 환경을 핑계대면서 남에게 가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가장 구차하고 졸렬한 행위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데에는 엄마의 공이 컸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그가 나한테 투자한 노력과 아픔만큼 자식을 이해해줄 용기가 없다. 엄마도 너무 사랑하는데, 자식도 엄청 사랑하겠지. 사랑 앞에서 지혜로울 수 있을까? 나는 너무 사랑할 것만 같아서, 사랑 앞에서 어리석어질 것만 같아서 자신이 없다.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인 자식이라는 존재를 미움과 원한 없이 키우는 것은 아주 어렵다는 것을 엄마를 보고 알았다. 견뎌내 온 슬픔을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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