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U, DCEU, 다크나이트
히어로라는 건 사회나 공동체에 결함이 드러날 때 (재난 상황이 대표적인 예) 그 결함을 초인적인 능력으로 메우면서 성립됩니다. 결국 히어로는 공동체에 결함이 있어야 존재 가능한 것인데, 히어로의 이런 속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배트맨입니다. 배트맨을 다룬 작품들 중에서 걸작, 명작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다크나이트>도 히어로의 이런 속성을 꽤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품이고요.
'히어로'가 픽션에서나 '직업'이 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보는데 히어로라는 건 결과론적인 것이에요. 상시 히어로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나 공동체에 항상 결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근본적인 결함을 해결할 능력이 되지 않는 사회나 공동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히어로'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영웅'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MCU가 그런 '결함'의 이유를 외부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죠. 더 강한 외부의 적에 맞서 '히어로'들이 모여 힘을 키우는 시리즈인데, 이런 면에서 MCU의 영웅들은 히어로라기보단 군대에 가깝습니다.
마블은 다음 페이즈에서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는데, 이건 양날의 검이 될 겁니다. 마블은 소수자를 신경 쓰는 척하지만 (대기업인 마블의 영화가 다수의 작가가 붙어서 집단 창작으로 이루어지는 이상 이건 위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소수자를 향하는 차별과 멸시의 원인을 외부로 돌릴 테니까요. '우회적'으로 표현한다고는 하나 어벤저스는 근본적으로 '외부의 더 큰 적에 맞서 힘을 모으는' 이야기인 만큼 여기서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면 사회 내부의 문제가 우주 바깥 외부에서 온 문제로 합리화하게 될 겁니다.
다시 <다크나이트>로 돌아가자면, 배트맨이 <다크나이트>에서 조커에게 패배한 이유도 여기서 기인합니다. 1편이 배트맨 비긴즈 곧 시작인데 2편인 다크나이트는 시작부터 배트맨이 은퇴하려 합니다. 배트맨은 고담시의 범죄와 그것을 소탕하지 못하는 부패한 공권력(즉 공권력의 부재)에서 탄생해서, 배트맨=브루스 웨인은 '불법 자경단'인 자신의 역할을 '올바른 공권력'인 하비 덴트에게 이양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배트맨의 본질은 조커와 다름없는 테러리스트거든요.
그래서 배트맨이 '명분'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불살주의는 조커와 배트맨을 가르는 유일한 차별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실 조커와 배트맨은 상징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배트맨이 은퇴하려고 하는 건 옳은 선택입니다. 배트맨은 범죄를 소탕하지만 그것이 올바른 공권력이 아니기 때문에 또 다른 범죄를 낳는 악순환을 만듭니다. 하지만 배트맨의 패착은 하비 덴트라는 '영웅'에게 기대었다는 데 있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영웅은 결과적인 것이고 현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웅은 '오래 살면 악당이 됩니다'. 시스템에 귀속된 개인은 나약하고,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그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긴 하지만,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주체가 배트맨이 아닌 경찰인 것은 이 때문입니다. 결국 올바른 공권력이 일어나 '영웅'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기원인 셈이죠. 크로넨버그가 이 영화를 '공허하다'라고 비판한 이유도 여기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