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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틴 Apr 19. 2023

소설가의 일 - 생고생은 사랑한다는 뜻

소설가의 일 - 김연수 산문


p.46

그러니 이 생고생은 피할 수 없는,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는 생고생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가장 힘들게 한다.

사랑이 없다면 피할 수 있었던 그 많은 생고생들이 이를 증명한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 생고생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건 내가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한다는 뜻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나를 가장 힘들게 한다.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 울 일은 없었을 텐데.’

‘8비트 컴퓨터에서 깜빡이는 초록색 프롬프트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을 텐데.’

‘사과 로고의 제품에 빠지지 않았다면 스티브 잡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텐데.’


사랑했으니 상대방을 견디려 했고, 사랑했으니 이 일로 돈벌이를 하게 되었고, 사랑했으니 잡스의 생을 쫓고 그를 닮고 싶어졌으니 말이다. 확실히 생고생이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누군가 생은 ‘고()’라고 말했다.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고,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일상다반사를 일컫는 거라 생각했다. 고, 고통, 괴로움, 생고생… 그렇다면 생은 이런 괴로움과 생고생을 통해 무엇을 사랑하고 싶은 것일까.


생이 등을 떠밀 때면 어쩔 수 없이 응해주다가도 이걸 확 다 놓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배 째라- 하고 뻔뻔하지도 못했다.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나서 내 몫의 생고생을 감내했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내일이면 나아지겠지, 다음엔 지금보단 괜찮을 거야.’


이 생고생을 겪어야 하는 이유를 진즉에 알았다면 조금 수월하지 않았을까. 나름의 이유를 발견하려고 알 수 없는 것들을 붙잡으려 노력했었다.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르러서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알아낸 것들은 본질이 아니었음을.


나는 과거의 무엇 때문에, 미래의 바람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 게 아니다. 누구 때문에 고통받았던  것도 아니다. 그건 그냥 그렇게 되어야 했기 때문이고 등장인물들은 각본 시나리오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결국 모든 톱니바퀴가 정교하게 맞물려서 지금 이 순간이 완성되었다. 


생은 무엇을 사랑하기에 이런 각본을 만들었을까. 지금의 현실을 겪기까지 그 모든 것을 왜 겪어내야만 했을까. 사실 답은 간단하다. 생은 나를, 나를 닮은 당신을, 우리를 닮은 타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숱한 사건을 통해서 사랑을 알게 하고 사랑을 보여주고 느끼게끔 했다.


오늘이란 각본을 받았으니 최선을 다해 '나'를 연기하며 살아가자. 사람들과 부대끼고 짜증 내면서, 울다가 웃으면서. 오늘도 진한 에스프레소 같은 하루였구나 깨달으면서.


그럼 바다처럼 넓고 깊은 지극한 사랑에 닿을 수 있다. 생고생의 끝에는 우리와 타인을 품어 안아주는 크고 따스한 가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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