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남이 아닌 나를 위한 달리기

정신이 육체를 앞선다/런던

by 막시

누가 런던을 비 오는 우중충한 도시라고 했던가? 리젠트 파크에서 처음 만난 런던은 세상에 없는 다채로움이었다. 하늘, 나무, 잔디, 온통 푸르렀다. 푸르기만 하면 운치 없다는 듯 벚나무는 분홍빛을 뿌렸다.

공원 산책로에서 달리는 청년들, 잔디밭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가족들, 축구를 하는 아이들, 벤치에서 담소를 나누는 어른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여유와 알록달록 무지개는 그곳에 있었다.

달리고 싶어 졌다. 봄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달렸다. 내가 달리니 아들도 달렸다. 달리기는 시차 적응에도 도움된다. 혹, 의학적 근거가 없더라도 플라시보 효과는 확실하다.

영국 날씨는 괴팍하다고 해서 옷을 두툼하게 입었는데 예상외로 따뜻한 날씨에 곧 땀이 났다. 외투를 벗으니 바람이 목덜미부터 온몸을 한 바퀴 돌며 상쾌하게 했다. 벤치에 앉아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았다.


이곳이 정말 런던인가? 초등학교 때 읽은 소설 <셜록 홈스> 속 런던은 늘 우중충했다. 비가 오거나 안개가 가득한, 그래서 트렌치코트가 어울리는 도시라는 말이 이해됐다.

직접 만난 런던은 전혀 달랐다(다음날부터 변화무쌍하긴 했지만). 런던 여행의 설렘과 이국적 풍경이 온몸을 감싸서 그랬겠지만, 한국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날이었다. 마흔이 넘어 처음 만난 런던은 그렇게 반전 있는 도시로 다가왔다.

공원 산책로를 걸으며 백조와 이름 모를 새들을 만났다. 나이 지긋한 런던 아주머니가 새들에게 먹이를 주었고 새들은 태연자약하게 먹이를 먹거나 사람들을 따라다녔다.

개구쟁이 아들이 소리치며 새들을 쫓았지만, 새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몇 번 더 그러던 아들은 포기하고 호숫가를 따라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아들을 따라 달리며 넓은 호수와 페달 보트를 타는 사람들의 여유로운 모습을 바라보았다. 달리던 아들이 멈추고 돌아봤다. “아빠, 우리도 저거 타자.”

셜록 홈스 박물관은 리젠트 파크 근처에 있다. 런던 여행을 결정했을 때 셜록 홈스 박물관은 당연히 가야 할 코스였다. 베이커가, 셜록 홈스, 왓슨 박사를 만나고 싶어서다. 어린 시절 셜록 홈스는 나의 영웅이었고 그때 장래 희망은 탐정이었다. 탐정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셜록 홈스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어른이 될 때까지 많은 꿈을 꾸었지만 실현된 꿈은 거의 없다. 거창한 꿈일수록 그렇다. 그래도 달리기 여행을 하며 살아가는 데 만족한다. 꼭 꿈을 실현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 이유는 주위의 많은 여행자와 러너가 살아 있는 증인이기 때문이다.

셜록 홈스 박물관에는 소설 속에 나왔던 소품들이 많았다. 셜록 홈스는 실존 인물이고 나는 역사 속 위인의 흔적을 찾아온 사람 같았다. 현실과 판타지가 공존했다.

일상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여행에선 현실이 된다. 그래서 여행은 판타지를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기회다. 홈즈라는 판타지에 빠진 나를 현실로 끌어낸 건 아이들이었다. “아빠 어서 보트 타러 가자.”


다음날부터 리젠트파크는 나와 아침을 공유했다. 리젠트 파크는 공원 바깥쪽과 안쪽에 하나씩 두 개의 산책로가 있다. 외부 산책로는 4km가 넘고 내부 산책로는 1km다. 두 산책로 모두 많은 사람이 걷고 달린다. 내부 산책로 안에는 영국에서 가장 큰 장미 정원인 메리 여왕의 정원이 있다. 오늘은 지난 며칠간 한 번도 달리지 않았던 내부 산책로를 달릴 생각이었다.

일상 달리기든 대회 달리기든 러너라면 누구나 계획대로 완주하길 바란다. 항상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크게는 갑작스러운 부상, 작게는 생리현상, 때로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멈추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온다.

이런 상황이 생길 때 러너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필 런던에서 나는 그런 상황에 직면했다. 해결하기만 하면 달릴 수 있는 아주 사소한 문제였지만, 큰 깨달음을 얻기에 충분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리젠트 파크로 향했다. 출발할 때는 화장실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2km쯤 달렸을 때 몸에서 신호가 왔다. 드넓은 공원에서 화장실을 찾기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계속 달렸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십 리는커녕 일리도 못 가 사달이 났다. 익숙한 공간이거나 도심이라면 카페나 공공기관 같은 다양한 해결책이 있지만, 공원이나 강변 같은 곳에서는 공공화장실 외에는 대안이 없다.

온몸이 뻣뻣해졌다. 화장실을 찾을 때까지 참을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머릿속에선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할 수 있는 방법은 화장실뿐이었다. 낯선 런던에서 노상방분이란 참사는 있을 수 없었다.

마침 대문을 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건물 안에 화장실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솟았다. "Hey sir, where is toilet?"

나를 힐끗 쳐다본 그는 말없이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가리켰다.

"에잇, 염병“

그를 붙잡고 다툴 수는 없었다. 1초라도 빨리 화장실에 가는 게 급했다. 괄약근에 온 힘을 주었다. 삼십여 미터쯤 달렸을 때 공원 안내도가 나타났다. 그 순간에도 못 참겠다는 본능과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이성이 대혈전을 펼쳤다. 다행히 화장실은 바로 근처에 있었다. 신이 나에게 던진 밧줄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쏜 화살도 나보다 빠르지 않을 것이다. 총알처럼 달려 화장실에 도착했다. 유료 안내판이 나를 가로막았고 수중에는 한 푼도 없었다. "환장하겠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밀쳤다. 부수고라도 들어가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신은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 엉거주춤 뛰어 변기에 앉는 동시에 바지를 내렸다. 바지를 내리는 순간 거시기도 쏟아졌다.


볼일을 끝내자 초조함은 가시고 여유가 찾아왔다. 세수하며 땀을 씻었다. 달려오면서 흘린 땀이 운동으로 난 땀인지 초조함으로 난 식은땀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을 어떻게 버텨냈는지 나조차 신기했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온몸이 배수의 진을 쳤을 수도 있다. 사람의 정신력과 인내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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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달리기가 일상이 아닌 대회였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상상하기 싫지만, 누군가는 그런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실제 대회에서 똥을 싼 남자 '미카엘 에크발'이 생각났다. 그는 2008년 19세의 나이로 스웨덴 예테보리 하프 마라톤에서 데뷔했다. 대회 출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설사를 시작한다.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달려 완주한다. 설사에도 불구하고 4만여 명 중 21위라는 대단한 성적을 거둔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완전 미친놈이네"였다. 지금은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지만, 그땐 그랬다. 달리기 초보였던 나는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입상 욕심이 나도 그렇지, 어떻게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데 똥을 싸면서 완주할 생각을 했을까 싶었다. 나라면 당장 기권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몇 년 전에는 그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대회를 준비하느라 최소 6개월 이상, 어쩌면 1년 이상 먹고 싶은 음식을 참으며 훈련에 매진했을 것이다. 그런 혼신의 노력이 있었으니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완주했을 것이다.

지금은 완전히 생각이 바뀌어 그를 존경한다. 열심히 준비한 그는 최악의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달렸다. 남이 바라는 대로가 아닌, 본인이 바라는 대로 달렸다. 지금 나는 에크발처럼 할 수 있을까?


미카엘 에크발을 생각하는 동안 다시 달리고 싶은 마음이 찾아왔다. 장미정원 대신 광고 촬영장으로도 손색없는 프림로즈힐로 향했다. 잔디를 밟고 달리며 종종 우뚝 솟은 나무 사이를 가로질렀다. 말 한 마리가 푸른 초원을 뛰어다니는 장면이 연상됐다. 전생에 말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내가 말띠인 것과 전생에 말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피할 수 없다.

프림로즈힐로 가는 풍경은 잘 가꿔진 잔디와 군데군데 솟아난 푸른 나무숲이 어울려 거대한 그림이 됐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물었다. '내일 다시 올 거지?'

프림로즈 힐 정상으로 향했다. 언덕이 막 시작할 때 나타난 가로수는 언덕으로 오를수록 좁아져 마치 결승선을 연상케 했다. 솟아난 힘으로 언덕을 올랐다.

정상은 런던을 대표하는 건물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모든 도시 전망이 그렇듯 이곳에서 런던 야경을 보면 더 아름답고 낭만적일 것이다.

혼자 떠난 여행이라면 저녁에 달려서라도 갔을 테지만,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모든 일정을 내 뜻대로 할 수는 없다. 때로는 아내 때로는 아이들에게 맞춰야 한다. 그래야 가족여행이 티격태격을 이길 수 있다.

내려갈 때는 오를 때와 정반대의 풍경이었다. 언덕 아래로 내려갈수록 가로수의 폭은 넓어지고 평지에서 가로수는 완전히 흩어졌다. 시야에는 오롯이 푸른 초원만 남았다. 말처럼 힘차게 언덕을 내리쏘며 CF 속 달리기 모델인 양 나르시시즘에 젖었다.


여행 중에 달리다 보면 종종 급한 상황을 만난다. 시간에 여유가 있을 때는 깨끗한 화장실이 있는 호텔로 가면 된다. 언뜻 이용하지도 않는 호텔을 가도 될까 싶지만 우리는 언제든 그 호텔에 머물 수 있는 예비 고객이다.

강릉에 친구들과 달리기 여행을 갔을 때다. 경포호수에서 경포해변으로 가는 도중에 호텔을 만났다. 마침 친구 하나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 했고 나는 당연한 듯 호텔 화장실을 추천했다. 대체로 부담 없이 호텔 화장실을 이용하겠지만, 혹시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다음 여행 때 그 호텔을 이용하면 된다.

카페, 식당, 호텔 등 관광지에 있는 대부분의 서비스업체는 여행자들에게 관대하다. 지금까지 여행하며 화장실 사용을 부탁했을 때 안 된다고 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누구보다 평범한 여행자인 나에겐 그랬으니 남들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42.195km 풀코스 마라톤 대회도 어쩔 수 없이 화장실에 가야 할 상황이 종종 생긴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민망하지만, 남자들은 대체로 숲 속이나 아무도 보지 않는 사각지대로 가서 해결한다. 주위에 공공화장실이나 주유소같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있으면 좋겠지만 화장실 찾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 어렵다.

대회 준비를 철저히 할 때는 42.195km를 달려도 화장실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설령 중간에 가고 싶어도 충분히 참을만하다. 실제로 나는 풀코스 대회 준비를 철저히 했을 때는 화장실에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특별한 목표 없이 느슨하게 대회를 준비했을 때만 화장실을 찾았다. 얼렁뚱땅 대회에 임하니까 몸도 대충대충이 됐다. 나는 정신이 육체보다 앞선다는 위인들의 말을 인정한다.

여자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달리기에 관한 한 여자는 남자보다 신체적으로 불편하다. 마라톤 대회 주최 측이 여자들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다행히 노상 방뇨하는 여성들은 거의 없다. 여자의 참을성은 대체로 남자보다 좋고 그렇게 진화했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예외는 있었다. 한 번은 새벽에 동네 당현천을 달리는데 길가 구석에서 어떤 사람이 엉덩이를 내리고 있었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뻔히 보면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점점 가까워졌다. 안타깝게도 여인이었다. 남자보다 우월하게 진화한 여자들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눈을 돌리고 그녀를 지나쳤다. 주위 사람들 모두 그녀를 못 본 체하며 각자의 길을 가거나 하던 운동을 했다. 그녀가 얼마나 급했을지 충분히 이해됐다. 신체적으로 남자보다 불편한 여자가 달리기 대회에서 더 배려받아야 하는 이유다.


프림로즈 힐과 리젠트 파크 달리기를 하며 떠났던 미카엘 에크발은 공원을 벗어나며 다시 찾아왔다. 미카엘 에크발은 다음 해 열린 예테보리 하프 마라톤 대회에서 9위로 스웨덴 국가대표가 되고 2014년에는 스웨덴 신기록을 수립했다. 똥 싼 남자인 그는 결국 스웨덴 최고의 마라톤 선수가 된 것이다. 그가 만약 똥을 싸면서 완주하지 않고 포기했다면 스웨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의지가 있었기에 그는 결국 최고가 된 것이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매번 다른 이유로 대회를 포기하거나 자신과 타협한다. 반대로 본인의 길을 꾸준히 완주하는 사람은 문제가 생겨도 결국 해낸다. 자신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을 넘어선다.

나도 미카엘 에크발처럼 할 수 있을까? 자신은 없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힘을 다해 준비했으니 대회 당일 컨디션이 최악이라도 오롯이 나의 달리기를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누구도 나의 레이스를 대신해주지도 않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미카엘 에크발이 더 존경스럽다.

숙소에 도착할 즈음에 시계를 보니 아침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천천히 가면 늦을 것 같아 속도를 높였다. 미카엘 에크발이 여전히 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행운이 있기를 바라며 그를 보냈다. 그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지만 똥과 밥은 서로 어울리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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