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에서 올림픽 마라톤 경기가 열렸다. 이날 결승선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독일인도 유럽인도 미국인도 아니었다. 관중들에겐 너무나 낯선 동양인이었다. 그는 2시간 29분 19초, 당시 마라톤의 벽이라 불리던 2시간 30분을 깬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우승자는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수였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그를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가장 기뻐해야 할 금메달리스트는 무표정했다. 시상대에 선 모습은 오히려 슬퍼 보였다. 대회가 끝나고 그는 친구에게 엽서를 보냈다. 엽서에는 세 글자와 그의 복잡한 심경을 나타내는 기호만 있었다.
"슬푸다!!?"
1992년 8월 9일, 56년 전 올림픽 우승자였던 손기정은 백발의 노인이 되어 몬주익 올림픽 경기장 관중석에 앉았다. 56년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금메달을 땄지만 웃을 수 없었다. 메달 수여식 때 월계수로 일장기를 슬그머니 가렸다. 그는 나라 없는 나라의 국민이었고 경기장에는 애국가가 아닌 일본 국가가 연주됐다.
그때 마음이 고스란히 다시 살아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십 년도 훌쩍 지났는데 그때 생각만 하면 여전히 설움이 북받친다.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두 손을 모았다. ‘이번이 올림픽 금메달을 딸 절호의 기회다. 어쩌면 살아 있는 동안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지 정확히 56년째 되는 날이다. 행운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후배들이 내 한을 풀어주면 좋겠다. 그러면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다.’
손기정 옹의 소원은 한국인이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었다. IOC는 줄곧 손 선수의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하고 있다. 본인의 국적을 바꾸기 위해 IOC에 끊임없이 요청했지만 IOC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그에 관한 미담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국민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국민이 그를 영웅으로 대우하는 이유가 단지 금메달 때문만은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가 국민에게 보여준 무엇인가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같은 시간, 시차가 8시간인 한국의 작은 시골 마을에 이제 갓 어린이 티를 벗은 중학생이 새벽을 깨고 TV를 켰다. 그도 황영조 선수의 금메달을 기대했다. 학교에서 배운 투철한 정신교육으로 애국심이 하늘을 찔렀고 중등부 1,500m 육상 선수로서 마라톤 대회에 관한 관심도 대단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났지만, 새벽잠을 극복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느 순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그를 깨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TV 해설자였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2019년 5월 나는 바르셀로나에 있었다. 27년 전 새벽에 깬 것처럼 이날도 새벽에 일어났다. 바르셀로나에 오기로 한 그때부터 몬주익 언덕과 몬주익 올림픽 경기장은 반드시 가야 할 코스였다.
콜럼버스 동상을 한 바퀴 돌아 몬주익 언덕으로 방향을 잡았다. 27년 전 황영조 선수와 일본의 모리시타 선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렸던 곳이다. 내가 황영조 선수가 된 마냥 백 미터를 힘껏 달렸다. 겨우 황영조 선수의 풀코스 페이스였다.
황영조 선수는 대로를 따라 스페인 광장으로 달렸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몬주익 경기장을 보고 싶어 언덕을 올랐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순간 평지가 나타났다. 몬주익 경기장까지 2.9km 남았다는 반가운 표지판이 나를 반겼다. 곧장 몬주익 언덕으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걸었다.
뒤를 돌아 달려왔던 언덕 아래를 내려다봤다. 바르셀로나 도시 풍경과 해변 뒤로 펼쳐진 새벽녘 어스름이 몽환적이었다. 언덕을 오르지 않고 황영조 선수가 갔던 길을 달렸으면 만나지 못했을 아름다움이었다. 역시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풍경은 여행을 더 빛나게 한다. 심장은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이제 달려도 괜찮아"
좁은 산책길을 빠져나오자 푸른 가로수가 양쪽으로 우뚝 솟은 대로를 만났다. 올림픽 선수가 된 것처럼 자세를 바로잡고 힘차게 달렸다.
낯익은 광고가 보였다. 버스정류장 벽면에 붙은 갤럭시 S10+ 광고다. 흐뭇한 미소가 일었다. 요즘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한국 광고를 쉽게 볼 수 있다. 1936년 나라 없는 나라의 청년 손기정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우뚝 솟은 올림픽 성화대가 먼저 보였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는 패럴림픽 양궁선수가 불화살을 쏘아 성화를 점화했다. 대단히 멋졌고 두고두고 회자됐다. 문득 27년 전 그 양궁선수가 진짜 성화를 맞췄을지 쇼를 위한 트릭이 있었을지 궁금해졌다.
몬주익 경기장 전체가 드러났고 나는 선수처럼 마지막 스퍼트를 했다. 문이 덜커덕 잠겨 있었다. "이건 아닌데…."
닫혀 있는 철창문을 흔들어보았지만 꿈적하지 않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결승전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달랬다.
23세 청년 황영조 선수는 경기 후반까지 일본의 희망 모리시타 선수와 엎치락뒤치락하며 우승 경쟁을 했다. 결승선 4km 지점인 스페인 광장을 지나면서부터 승부의 추가 황영조 선수에게로 조금씩 기울고 있었지만, 몬주익 언덕에 접어들어서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서로의 키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가파른 언덕을 지나 내리막이 나타났을 때 황영조 선수는 온 힘을 쏟아냈다. 얼굴에는 고통이 역력했지만 팔과 다리는 그 어느 때보다 힘찼다. 그때였다. TV 볼륨을 올리지도 않았는데 해설자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고 꾸벅꾸벅 졸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리시타는 TV 화면에서 사라졌다.
황영조 선수는 독주하며 금메달을 확신케 했다.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들어서는 순간 박수와 함성이 몬주익을 가득 채웠고 그는 관중을 향해 승리의 키스를 날렸다. 골인 지점에선 두 팔을 치켜들었다.
나도 감격에 울컥하며 두 손에 힘을 불끈 주었다.
관중석에서 그 광경을 바라본 백발의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56년 전의 설움이 살아나 울었고 황영조의 금메달이 기뻐서 웃었다. '이젠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다. 영조가 너무나 자랑스럽구나.'
황영조 선수는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고 잠시 뒤 들것에 실려 나갔다. 최선을 다한 마라톤 선수들에게 종종 일어나는 상황이지만 백발이 된 그는 황 선수가 걱정돼 서둘러 운동장으로 갔다.
황 선수는 웃고 있었다. 노인이 된 영웅 손기정은 소원을 풀어준 청년 황영조를 힘껏 안았다.
뜨거워졌던 심장이 제 온도를 찾았다. 반대편 황영조 선수 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바르셀로나를 방문한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황영조 선수 비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마침 스페인 러너 커플이 내 곁으로 달려왔다. "사진 좀 찍어주세요"
무표정하고 어색한 자세로 서 있는 나에게 말했다. "기념비 속 선수와 같은 자세를 따라 해 보세요"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러너들도 친절하긴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찍을 작정인지 다양한 포즈를 계속 요구했다. 그들 덕분에 웃었고, 멋스러운 사진을 얻었다.
밝게 웃는 모습으로 사진을 건네는 그들에게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비석에 관해 굳이 설명했다. "이 비석에 있는 사람은 1992년 바르셀로나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황영조 선수다. 그는 한국인이고 나도 한국인이다. 나도 너희들처럼 러너다."
아차, 그들에게 세계사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많아봐야 스물다섯이 되지 않았고 1992년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지만, 진작에 그만했어야 됐다. "Thank you."
나란히 대화하며 달려가는 그들이 멋졌다. 구글맵을 작동해 숙소를 검색했다. 갈 때는 왔던 길이 아닌 황영조 선수가 달렸던 대로로 가기로 했다. 미로 미술관 옆에 있는 공원 사이 지름길로 갔다. 스페인 광장에 가는 사이 카탈루냐 미술관, 스페인 마법의 분수를 만났다. 몬주익은 언덕은 거대한 관광 공원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다시 오고 싶었다.
스페인 광장에서 황영조 선수가 달린 길을 역으로 뛰어 람블라 거리에 들어섰다. 아침이 되어 제법 많은 행인들과 상인들로 부산했다.
보케리아 시장에 갔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이다. 이른 시간에도 상인과 관광객이 어울려 활기찼다. 시원한 딸기 망고 주스를 마셨다. 발끝까지 갈증이 해소됐다.
보케리아 시장의 명물은 하몽이다. 상점마다 걸려있는 돼지 뒷다리는 이곳이 스페인임을 일깨웠다.
오후에 가족과 함께 다시 몬주익 언덕을 향했다. 파랄렐 역에서 푸니쿨라를 탔다. 푸니쿨라를 내리니 케이블카가 나왔다. 천천히 달리자 딸이 뒤에서 중얼거렸다. “그냥 케이블카 타고 가자”
딸을 보며 말했다. “날씨가 너무 좋잖아. 걸어가자."
바르셀로나의 날씨 덕에 딸은 군말 없이 걸었다. 아내와 아들은 진작부터 따라왔다. 달리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몬주익 언덕을 올랐다.
몬주익성 둘레길을 찾은 연인, 가족, 친구들은 5월의 멋진 날을 즐기고 있었다. 몬주익성은 우리의 남산 같은 느낌이었지만 남산과 달리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바라본 지중해는 하늘과 맞닿았다. 선착장에 머문 크루즈는 여행을 더 낭만적으로 만들었다.
몬주익성을 걷고 달리며 한 바퀴 돌았다. 걸을 땐 걸어서 달릴 땐 달려서 쉴 땐 쉬어서 좋았다. 둘레길을 돌며 퀴즈 놀이를 했다. 문제를 내는 사람은 엄마 아빠였고 정답을 맞히는 사람은 딸과 아들이었다. 문제도 정답도 쉬웠다. 서로 맞추려고 안달했다. 그렇게 각자 여행을 마음에 새겼다. 행복했다.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있어서. 날씨가 너무 좋아서. 언덕에서 바라본 바다가 너무 아름다워서.
몬주익 경기장으로 갔다.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이번에는 뛰지 않고 버스를 탔다. 금방 몬주익 경기장에 도착했다.
아이들에게 황영조 선수 이야기를 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저 경기장에 1등으로 들어왔어. 우리나라 애국가가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울려 퍼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지. 더군다나 그 금메달은 올림픽의 마지막 금메달이었어. 그래서 더 의미 있었단다. 아, 바르셀로나 올림픽 첫 금메달도 우리나라가 땄어. 당시 고등학생이던 여갑순 선수가 사격에서 땄어."
"아빠! 진짜야?" 아이들이 놀라워했다. 아침에 만난 바르셀로나 청년 커플에겐 의미 없는 이야기였지만 아이들에겐 우리의 멋진 역사였다.
버스를 탔다. 황영조 선수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들은 황영조 선수를 두고 운이 따랐을 뿐이라고 폄훼한다. 마라톤이 운으로 가능한 운동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마라토너조차도 그렇게 말한다.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에서 운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딸 수 있을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한 달만 달리기를 멈춰도 완주하기 벅찬 운동이 마라톤이다. 그런 종목에서 천재라서 운으로 금메달을 딴다? 천재 할아버지가 와도 안 될 말이다.
그는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2년 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올림픽 금메달이 운이 아니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는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달린 몬주익의 영웅이었다. 손기정 선수가 일본 국적이었으니 대한민국 국적으로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유일한 선수이다.
또 한 명의 마라토너가 떠올랐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다. 그 순간 우리는 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황영조 선수보다 이봉주 선수를 더 좋아하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마라토너에게 재능보다는 인성과 자기 관리를 기대한다. 황영조 선수가 실제로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대중에게 비친 모습에선 인성과 자기 관리와는 거리가 멀다.
황영조 선수를 향한 아쉬움은 새로운 영웅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손기정 옹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살아가는 동안 올림픽 마라톤에서 한국인이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한 번 더 보고 싶다. 손기정 선수가 첫 금메달을 따고 황영조 선수가 두 번째 금메달을 따는 데는 56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지만, 세 번째 금메달을 따는 데는 그보다 짧기를 바란다.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딴 지 27년이 지났으니 앞으로 29년 이내에 금메달을 따면 좋겠다. 그때가 되면 나도 할아버지가 되겠지만 어린 시절보다 더 열렬히 응원하고 환호할 생각이다. 그때 금메달을 따는 사람은 제2의 손기정, 국민 영웅이 되길 바랐다. 두 아이가 떠드는 소리에 눈을 뜨니 저 멀리 태양이 강렬하게 나를 비췄다. 마치 나의 바람을 들어줄 거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