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트비체의 여운과 바다오르간의 소리를 마음에 담고 난 그다음 여정은 붉은 지붕의 향연이 펼쳐질 아드리아해 바닷가 두브로브니크로! 의 여정이 시작되던 날로 하늘은 높고 태양은 밝게 떠올라왔다.
사실 7박 9일 일정 중 이곳 숙소에서만 이틀을 묵는 상황이라 마음의 여유도 있었고, 여행장소 중 아마도 가장 궁금했던 도시이기도 했던 탓에 무척이나 설레었었다.
숙소에서의 풍경 또한, 작은 아가 고양이까지 만나는 정다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향한 그곳, 언덕 위 전망대 쪽에서 바라본 그 해안과 바다와 절벽과 햇살과 반짝이던 윤슬은 숨을 막히게 하기에 충분했었다 싶다.
... 잠시 이곳에 대해 남겨본다.(네이버 지식)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 연안에 있는 관광 도시. 행정구역상으로 두브로브니크-네레트바 주(Dubrovnik-Neretva County)에 속한다. 2021년 인구는 41,562명. 고딕,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시가지와 그곳을 둘러싼 성벽의 경관으로 유명하다.
남북으로 긴 형태의 크로아티아에서는 남쪽으로 갈수록 물가가 비싸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최남단이나 다름없는 이곳은 물가가 가장 비싸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수도인 자그레브의 물가는 두브로브니크의 물가보다 적게는 30%, 많게는 반 이상 저렴하다. 두브로브니크는 관광도시인 탓에 물가가 비싼 편인데 두브로브니크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해안 소도시 차브타트(Cavtat)만 가도 물가가 두브로브니크의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라구사(Ragusa)라고 불렸다. 라구사는 구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플라차 대로를 기준으로 바다 쪽을 이르던 말로, 원래 섬에 가까웠던 이곳에는 로마계 주민들이 거주했다. 슬라브계 주민들이 거주지를 형성한 육지 방면의 이름은 두브로브니크였다. 어원에서도 양측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데, 라구사는 돌을 뜻하는 라틴어 Lausa에서, 두브로브니크는 떡갈나무를 뜻하는 크로아티아어 Dubrava에서 왔다. 1차 대전 이후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외래어의 영향을 받은 지명인 라구사 대신 크로아티아어에서 나온 두브로브니크를 택했다.
그 붉은 지붕들이 펼쳐지던 언덕위에 야호도 외쳐보고, 조금의 여유로운 커피타임까지 만끽하며 풍경을 즐겼던 시간이다
그렇게 찬란한 그곳을 떠나 구 시가지로 향했다.
구시가지로 들어서며 어느 것 하나 눈을 뗄 수없을 만큼 아름다왔었다.
유람선안에서 브라보 건배도 하고,
눈으로 본 나체 해변 (2010년 스페인 시체스에서 본 뒤 오랫만에^^)
절벽 위 성곽에서 바리본 찬란한 윤슬의 눈부심
성곽에서의 우리
ㄱ렇게 성곽을 돌고 내려와 잠시 나 홀로 구시가지의 뒷골목 걷기도 오래 남을 기억이 되었다
잠시 이곳의 역사도 간략히 남 셔둔다.
7세기 후반 라구사를 건설한 사람들은 아바르와 슬라브 등의 이민족들에게 약탈당한 도시를 뒤로 하고 새 거주지를 찾던 인근 로마 식민 시 거주민들이었다. 이들은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고 요새를 건설했다. 시간이 지나 라구사 인들은 좁은 해협 건너 스르지 산기슭에 살던 슬라브계 크로아티아인과 차츰 동화되기 시작해, 나중에는 해협을 메워 대로를 건설한 뒤 성벽도 그 너머로 확장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던 866년에는 한창 세력을 뻗치던 아글라브 왕조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15개월 동안 공격을 버티던 라구사는 황제 바실리오스 1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바실리오스 1세는 선단을 보내 라구사를 구원했다.
라구사는 동로마 제국에 이어 베네치아 공화국과 헝가리 왕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지만 여전히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했다. 도시는 일찍이 중요한 무역 거점으로 성장하여 라구사의 상인들은 이탈리아와 발칸은 물론 영국까지 돌아다니며 상업 행위를 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에도 라구사 출신 선원이 끼어 있었다. 1358년 자다르 협약 이후 시작된 헝가리 지배 당시 라구사는 금전을 바치는 대신 상당한 자치권을 위임받아 공화국 체제로 전환했다. 도시의 책임자는 렉터(rector)[2]라고 불렸다. 상인 공화국 라구사의 부는 날로 늘어나 15세기에는 국고에 7백만 두카트를 보유할 정도였다. 전성기의 라구사는 4만 인구에 3백 척이 넘는 선단을 보유한 부유한 도시였다.
라구사의 쇠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1667년의 대지진이었다. 4월 7일 오전 8시경 발생한 지진과 지진해일로 도시와 선단이 파괴된 것은 물론이고 공화국의 최고위층을 포함한 수천 명의 시민이 희생당했다. 살아남은 시민들의 노력으로 도시는 복구되었지만 라구사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는 재현하지 못했다. 지금의 도시는 당시 행해진 대대적인 복원 계획의 산물이다.
자유시간이 여유로워 다 같이 본고장의 젤라토 가게에 줄도 서서 맛도 보고 , 광장에 앉아 지나는 여행객과 현지인들도 구경하고 , 서점에서 그림과 책도 들여다보고....
재미난 오리 숍에서 딸 가진 친구들은 선물도 사고 , 100프로 오렌지주스를 마시러 노천카페에 앉아있기도 했던 여유로운 시간들이 추억이 되었다
카페안에서 프라다칼도도 만나고
달리 전시가 있는 줄을 몰랐어서 아깝게 놓치고 ,
모든 아름답던 순간도 아쉬워 찰칵찰칵 담나뵜던 역사의 도시 안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구시대로 날아갔던듯한 착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