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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없어져서 너무너무 좋아요

내가 없어지니 평생을 바라던 이상향의 인간이 되네요

by 는개

무기력이 지속되고 있어요.

죽고 싶은 마음이 좀 누그러들어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내려앉았지만, 아무것도 하기가 싫고 무엇보다 의욕이 없어요.


밑으로 밑으로 파묻히는 날이 눈송이처럼 내려와요. 아이패드 속의 이미 몇백 번이나 본 (저는 좋아하는 작가의 특정 드라마의 특정 부분을 천 번 가까이 봐서 대사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게 외우고, 특정 책의 특정 몇십 페이지를 몇 백번을 읽어서 몇 문단을 그대로 줄줄줄 암송하는 책도 있어요) 책들을 보고 또 보면서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1주에 한번 가던 병원에서 조절하던 약이 적정하게 맞춰졌는지 두 달이 넘게 그대로 나오기 시작했어요. 하루에 먹어야 할 총량이 적어지기 시작하더니 필요시 약의 종류가 늘고 진료상담의 텀이 늘어났습니다. 매주 상태를 봐야 하는 위험환자에서는 빠졌다는 의미 같더라고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어떤 것에도 흥미가 없어져서 그런가 보다고 넘겼는데 점점 감정이 없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어요.

지금 내겐 어떤 희노애락도 없다는 것을요.


길거리를 걷는데 그 어떤 것도 예뻐 보이거나 흉해 보이지 않았어요. 그냥 인식만 됐을 뿐.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데 소음이 시끄럽지도 않고 짜증도 나지 않았어요. 그저 현상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폭풍 같은 감정에 휘몰아쳐서만 살아와서 그런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순간순간이 어색한데 그 어색함이 굉장히 신기하고 신선해요.


저는 어릴 때부터 방정맞고 시끄럽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말 수가 없고 얌전한 여동생과 늘 비교되며 동생 반만이라도 해라는 소리를 수 없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레퍼토리 중 하나가 동생은 안 그러는데 얘는 왜 이렇게 철딱서니가 없냐는 게 있을 정도? 였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침착하고 조용한 사람이 되고 싶었었어요. 저도 모르게 이상향이 되었는지도 몰라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타자들이 내 표정을 읽을 수 없는 포커페이스가 되어 어떤 상황에서든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앞을 헤쳐나가는 사람이고 싶었어요. 명석한 두뇌와 현명한 판단으로 누구에게나 칭찬 듣고 환영받는, 못하는 것 하나 없이 다 잘하는 수많은 드라마나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현재, 이 의미 없는 나날들의 연속 속에서 저는 아이러니하게도 외형적으로는 평생을 되고 싶었던 이상형의 모습에 부합되는 부분이 많게 되어있네요.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는 게 이렇게 괜찮을 줄은 몰랐어요. 인간관계를 최소한으로 하고 누구도 안 만나고 산지 몇 년째라서 바로 체감하진 못하고 띄엄띄엄 알아가고 있어요. 약간의 우울감 말고는 별 감정이 없으니 힘없는 마음이 이제 좀 살겠다고 만세를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무엇보다 가진 감정의 스펙트럼은 넓은데 비해 숨기는 힘이 턱없이 부족해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기가 고됐었어요. 그 고됨이 현저하게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살기 싫은 마음이 좀 느슨해지는 기분이에요.


괜히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는 소리도 안 들을 테고, 공연히 흥분해서 일을 그르치지도 않을 거고, 마음에게 휘둘려 통곡하지도 않을 테고, 타인에게 상처받아 울 일도 없고, 나잇값 못 한다는 행동들로 손가락질받지도, 사회생활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괜한 감정을 들켜 괜한 구설수에 오르지도 않게 될 테니까요. 드라마 주인공들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요.


일단 지금은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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