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잔뜩 시시하대도 사회적 동물이라 지위와 위치는 존재하니까
어느 날, 늘 보던 교양 프로그램에서 삼청교육대를 다룬 이야기를 보고 있는데 피해자의 인터뷰 중 한 대목이 꽂혀 들렸어요. "목숨 걸고 탈출했다가 헌병에게 잡혀 징역을 살고 나온" 것도 힘들었지만, "더 힘든 건 사람들의 시선"이었다는 거였어요.
사실,
시선의 문제였어요
징역을 사는 것이 어떤 정도의 힘듬인지 상상할 수 없어요. 하지만 하나는 알아요. 짐작으로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의 힘듦을 혼자 겪는 것과 타인의 시선을 받으며 겪는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사람들의 시선.
그래.
시-선
그나마 내가 더 깊은 심연으로 빠지지 않는 건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어요. (선생님은 그걸 의지라고 하던데 거기에 동의하진 않아요)
어항처럼 내 한 몸 쪼그리기 비좁아도 머리카락 하나까지 보이지 않게 숨겨 줄 수 있는 공간과, 무슨 일이 생기면 병원으로 갈 수 있는 진료비와 약값은 있어야 하니까. 의료보험이 안 되는 비급여 약을 처방해도, 필요하다면 몇십만 원, 몇백만 원이 든다는 정신 분석을 받아야 할 수도 있으니까 돈은 벌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울이에게 생업을 뺏기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내게 온 고통은 내가 견디면 그만이에요.
못 견디면
못 견디겠다고 울든, 말하든, 구역질을 하든, 찌르든, 자든.
영원히 자든.
뭘 해도 어쨌든 내가 결정할 수 있어요.
속수무책으로 감정에 휩쓸려서 절대 자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 하나만 해치고 끝날 일이니까요.
하지만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내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인걸요. 나에게 어떤 의도가 있든, 없든, 어떤 의도를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나를 보는 타인의 생각과 나를 판단하는 모든 기준과 근거는 전부 내 것이 아니라 어떻게 비칠지 어떻게 생각될지 몰라요.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금방 극단의 상황까지 상상되고, 금방 상상 속에 갇혔어요. 토할 것 같은 기분과 비행기가 이륙할 때 정도로 온몸으로 밀려오는 압박감. 눈앞은 제대로 초점이 맞지 않고, 상륙한 태풍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뉴스 속의 제주의 날씨처럼 휘몰아쳤어요.
불안과 초초가 공포로 변해 잔뜩 굳어 있다가 그 시간이 지나가자 가라앉는 걸 알아챘어요. 한참을 그러다가 겨우 눈을 뜨고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자 지금 나의 처지를 짚으며 종이에 써봤어요.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내가 보기도 두렵지만, 모르고 두려운 게 알고 두려운 것보다 더 힘드니까요. 그럼 차라리 알고 덜 두렵자. 객관적으로 짚이는 대로 적어보다 보니까 그 몇 가지 사실로도 무서움이 덜어지더라고요.
진짜 괜찮은 거라고 안도의 숨을 쉬다가 문득 이런 내 모습이 너무 웃겼어요.
도대체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된 거죠?
강점도, 약점도 다 보이고, 싫고 좋음이 다 드러나 나이를 먹어서도 이렇게 표정관리를 못 하냐고 한 소리씩 듣던 나인데... 언제나 밝고 명랑하고 사람이 좋아서 몇 개씩이나 모임을 갖고 주말마다 누군가와 항상 만나던, 극강의 엔프피였던 그런 나인데...
...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몇 년에 걸친 병원 기록은, 수사요청이 없는 이상 알 수 없어요. 보험 설계는 이미 다 끝났고 어쩔 수 없이 말해줘야 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 역시 문제 될 것도 없죠. 내가 범죄를 저질러 수사받아야 할 문제를 만들지 않는 이상,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고, 신경정신과 치료를 오래 받고 있고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누군가가 알게 될 일은 없을 거라는 건데...
왜 이리 겁도 많아지고 전부 다 무서워지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만 찾아다니며 계속 숨으려고만 하는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봐도 겁 많은 지금의 내가 어차피 이럴 거라는 걸 알고, 허세 부리는 것일지도 몰라요.
사실 알아요. 전혀 상관없는 누군가의 시선까지 신경 쓸 만큼 내가 여유로운 것이 아니라 세상사람들은 상관없는 누군가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누군가 알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공포감에 떠는 건, 나의 사회적 지위와 위치 때문이더라고요. (사회적 지위와 위치라는 말에 뭐 엄청 대단한 걸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실은 그것이 아니에요. 나는 그냥 어떤 중소기업의, 상사가 훨씬 더 줄줄이 많은 시시한 한 사람일 뿐이에요)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를 바라봐주거나, 도움을 요청하거나, 날 목표로 해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도 너무 무겁고 버거워요.
어떤 소설책에서 보았었어요.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이 세상에 별 영향이 없는 시시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거라고.
내가 수많은 시시한 인간 중 어느 정도의 시시함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확실한 건, <흥부가>의 가난 타령인 양, 시시함으로는 지지 않을 정도의 처지를 가졌다는 거예요.
드라마 주인공의 배경도 못 될 가난과, 너무 흔한 불화만 있는 가정환경, 어디서든 보이던 보편적인 부모, 친척, 조부모. 베이비붐 세대의 평균보다는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가진 지방 거주 부모. 특출 난 것 없는 형제관계와 그로 인해 너무 뻔하게 펼쳐질 2,30대의 생활. 대략적 삶의 흐름과 사고방식, 가치관들이 'K-장녀'라는 딱 하나의 신조어 하나로도 설명되는 그런 생애를 가진 사람.
시시하고
시시해서
더 시시하다 못해
지루한
그냥 그런... 처지.
여태까지 보고 접한 모든 것들 중에 시시함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호시노 겐의 <시시한 것들>도 이길 수가 없는 시시한 지금까지의 일생.
이렇게 시시한, 먼지보다 작은 존재인데도 왜
괜찮지 않을까요.
그런 시시한 내가, 누구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전적인 의지를 가지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 무섭고 부담스러워서 나는 선생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상비약을 3배나 더 삼켰어요.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는 이미 흔한 이름이 되었고, 치료되어야 할 병으로 인식되어 방송에서도 쉽게 말하고, 언론에서도 많이 조명되었고 조명되고 있어요. "코로나 블루"등으로 사회 현상으로 불리기도 했고, 세상에 이를 자신 있게 공개한 용기 있는 사람도 꽤나 많이 존재해요.
그만큼 쉽게 오르내리고, 흔해졌지만 세상 사람들의 인식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아요. 이제는 여기저기서 마음의 '감기' 정도가 아닌 '질병'이라고 말한다지만, 사회현상으로서는 이해하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인정하고 쉽게 넘어갈 수 있다지만, 막상 자신 곁의 가까운 주변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져요.
지척에 연결된 지인이 우울증을 앓고 있고, 호르몬 이상 때문에 예민하게 반응하거나하는 예상치 못한 현상을 직접 보거나 겪으면 자신도 모르게 거리를 두죠. 이상한 사람, 예민한 사람 또는 가까이하기에는 좀 그런 사람이라며 서서히 선을 긋고 서서히 멀어져 가서 결국에는 어색해져요. 특히 크든 작든 자신의 이익에 상관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인터넷 속의 실체 없는 누군가들은 끊임없이 용기를 내라고, 잘못된 게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딱히 좋은 건 없더라고요.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해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타인이 있는 한 사회적 지위에는 분명 영향을 미쳐요. 아무리 친하게 지낸다 해도 결국 직장 동료는 직장 동료일 뿐이더라고요. 가족이라고 해서 다 받아들여주거나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요.
겨우겨우 용기를 냈는데 돌아온 상황들에 실망하신 분들도 있겠죠.
저도 그랬었으니까요.
이제는 철저히 숨깁니다.
혹시 나와 같은 당신이 있나요?
그거 나쁜 거 아니에요.
누군가를 속이는 것도 아니고. 잘못하는 일도 아닙니다.
가족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데 원래부터 타인이었던 사람들은 오죽하겠어요?
오히려 그들이 당연한 거 아닐까요.
괜찮습니다.
당신도,
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