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실, 사회적 지위와 위치의 문제 Ⅱ

이렇게 잔뜩 시시하대도 사회적 동물이라 지위와 위치는 존재하니까

by 는개

재치료를 시작한 지금은 세상을 돌아다니는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길거리를 다니면서 사람들이 무서워 몸을 움츠리며 마음을 졸이고, 문득문득 낯선 장소에 가면 잔뜩 경계하는 사막여우처럼 한동안 굳어 있다가 숨을 쉬어요. 하지만 어쨌든 다닐 수 있어요. 또 편하지 않은 정도의 사람이라면 굳이 피하지 않고 얼굴도 마주할 수 있고요. 내가 원하는 가면을 쓰고 일상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채로 사는 이 시간들이

굉장히 신선해요. 묘하고.


저에게 감정은 앞서있었어요.

늘 마음은 내 앞에 있고 저는 그 뒤에 있거나 파묻혀 있었죠.


내가 변하면 모든 게 변한다더니

똑같은 세상이 다르게 보이네요.


뭐랄까, 마치 지미집으로 눈앞의 일들을 관조하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몸체는 여기 있고 지렛대 같은 기구 써서 가득 클로즈업해서 보는 기분이랄까요


그런데 말이죠.

뭔가 선명하게 정돈되는 느낌이긴 해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누구도, 무엇도

보고 싶은 것도, 그리운 것도, 기쁜 것도 없어요.


정말 아무- 생각도,

아무런 욕망도,

아무런 기력도.


또, 그와 함께 이런 이런 일을 미리 해두면 동료들이 기뻐하겠다는 헤아림도, 어떤 부탁이나 잔일이 오면 팀을 위해서 해야 하겠다던가 하는 의무감도 못 느끼게 됐습니다.


하지만 불편해지는 건 다른 문제더라고요. 그것도, 엄연히 조직이라는 게 존재하는 곳에서는. 특히. (규모가 작든 크든 그건 상관이 없어요)


그 사람과 일하면 피곤해,

그 사람과 일하면 골치가 아파,

그 사람이랑 얽히면 꼭 스트레스받더라.

그 사람은 불편해. 피하는 게 상책이야.


그리고 타인들의 생각은 언제나 제게 도착합니다.

내가 착각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피해망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런 걸 거야, 그런 걸 거야.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피하는 사람들을, 내 마음 탓이라 돌려보며 몇 번을 몇 번을 몇 번을 마음이 멋대로 날뛰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어요.


피해망상 회로와는 다른,

사회 초년생은 아닌 내가 그렇게 감지했거든요.


피해망상은 있지만 그래도 사회 초년생은 아니니까요.


사실, 사회 초년생이거나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내가 나이가 어렸다면 별 상관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사회 초년생에게 '일'이라는 것은, 열심히 해야겠다, 잘하고 싶어, 문제 일으키지 말아야지. 실수하지 말아야지, 상사에게 잘 보이고 싶다, 혹은 못 하게 보이고 싶지 않다. 정도일까... 하지만 주변 반응들을 그렇게 치부하기엔 온몸의 세포가 소리를 질러대고 비웃어댔어요. 그들은 널 피하고 있어! 앞에선 저렇게 웃어도 무능하다 열심히 씹어대고 있다고!


머릿속에서 그 비명 같은 비난을 견디려 허벅지를 찌르고 손등을 긁어대며 어떻게든 버티다 물도 없이 약을 씹어 넘기기를 반복했습니다.


타고난 성격이 눈치가 없었던 탓에 나는 많이도 잃어봤고, 많이도 울어봤고, 많이도 무시당하며, 많이도 뒷말을 들었습니다. 대학생활은 반 사회라더니, 반은 맞았는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만난 사람들의 모습은 별다르지 않았어요. 길고 짧음은 있었지만. 대학 신입생 때부터 투잡 이상을 했던 경험이 쌓아놓은 과거에 감정이 거둬지니 사실이 남아 나를 대하는 타인의 태도가 보이더라고요. 스타 앞에 선 열성팬처럼 내 마음이 너무 앞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가득 발견 됐습니다. 잠자고 있던 과거의 톤이 달라졌어요.


그 기억들에게 이성이 다른 잣대를 드리우자 전혀 다른 팩트가 보였어요. 우울이와 함께라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행동 강령이 생긴 느낌이더라고요.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지 하는 대처방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습니다.


어쨌든 나를 보고, 내가 했던 (이 보잘것없는) 실적을 목표로 해보고 있다고 말하는 후임이 생기면 그에게는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되어주어야 하더라고요. 완전무결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거창한 말은 아닙니다. 다만, 직장에서 나를 보는, 나보다 늦게 입사해 나를 선배로 여기는 후배 직원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나는 나 자신의 감정 하나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어야 하더라고요.


나를 보고 있는 그 후배 직원 한 명이 일을 하다가 질문을 하고 싶거나, 무슨 위기가 와서 나를 찾으면 그 상황을 판단하고 해결책을 주거나 도움을 줘야 하는 위치에 있는 선임 직원이 자기 자신의 감정조차 조절 안 돼서 보호받거나 행동을 이해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눈치채면, 마냥 편하게 나를 찾을 수 없게 되더군요.

그리고 한 번 이 부분이 알려지면, 나는 그저 일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인데, 아닌 게 되기도 했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직장동료는 본인의 감정의 반영인지 의심하지도 않고 내가 기분 나쁘게 이야기했다거나, 언짢게 얘기했다거나 생각하곤, 그걸 알고 있던 사실로 연결시킵니다. 혹시 상대가 과민하게 반응해서 괜히 내게 화풀이한 게 아닌가, 혹시 내가 괜히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이 아닌가 같은.


어떻게든 그런 식으로, 혹은 비슷하게 한 번이라도 연관시켜 연상하게 되면 결국 일하다가 해결하지 못해서 도움을 청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났을 때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찾더라고요. 그러면 나는 후배 직원이 일으킨 간단한 문제를 커버해 주는 것조차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 되는 거죠. 내가 우울하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우울한 건 내 잘못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의 잘못도 아니니까요. 결국 그렇게 되면 우울 이를 또 원망하게 돼요.


사회는 녹록하지 않고, 나 역시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숨겨야 해요.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일 잘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거창한 이유가 아닙니다. 그저 내 몫은 해 낼 수 있는, 그저 내 자리는 메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말하더라고요. 직장에서는,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아니었어요.

적을 만들지 말기 이전에 먼저,

'편'을 만들어야 하더라고요.


그렇다고 절대적인 내 편을 만들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라도, 그래도

부당한 일을 당하면 편 들어줄 수 있는 동료나 선임, 후임정도는.


하지만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어요.

적을 만들지 만들기 이전에, 편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실은, 너무 많은 경험들이 말해줬는데 제가 눈치가 없어서, 마음이 앞서느라 못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백번 양보해 상사라면 그래도 좀 인간적인 면모를 기대해 감싸주기를 바라보거나, 그런 것 역시도 품어줄 수 있는 것이 자격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결점을 알고도 편이 되어 줄 수 있다고. 그렇게.

그렇지만 반대라면, 절대 그럴 수 없어요.


내가 그 사람의 지지가 되고 용기가 되고

응원이 되어주어야 하는 한.


그래야 하는 사람이, '나 자신의 감정 하나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들키는 순간 모든 건 무너지니까.


병원의 이름이 쓰여 있는 약 봉투 같은 건 집에 두고 파우치에 따로 담습니다. 타이레놀 같은 진통제와 알러지성 비염약, 대일밴드 같은 것 등과 같이 넣어서.


용기를 내기엔 제 곁의 우울이는 너무 소심하고 말도 안 되게 겁쟁이예요. 극강 엔프피인 저의 에너지를 저 멀리 날리고 저 심해 밑으로 꾹꾹 누르고 있지만 그래도.


하지만 이해해요.

우울이를 내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우울이 탓으로 돌리고 있는지 모르거든요.


별 뜻 없는 타인의 시선에도 혹시 날 싫어하는 것 아닐까, 별 뜻 없는 한 마디에도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닐까 하며 흠칫흠칫 하는 겁쟁이라.


뭐 볼 게 있다고 이런 내게 와서 안 가고 옆에 있는지.

그래도 옆에 있으니 저도 같이 있으려고요.


저와 어쩌면 닮은지도 모르는 우울이.


사는데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오늘도 다짐하며 우울이와 같이 그렇게

집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keyword
이전 13화사실, 사회적 지위와 위치의 문제 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