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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여행자 Mar 17. 2020

버림받은 노새

여행 에세이 <해마다 떠났어 반겨줄 곳이 있으니까>의 샘플원고

독립출판 여행 에세이 <해마다 떠났어 반겨줄 곳이 있으니까>의 샘플원고입니다.

프롤로그와 목차 3(영국: 나의 첫 반려동물은 당나귀)을 먼저 만나보세요!



버림받은 노새     


  열흘이 지났을 때 발견한 사실 하나. 읽었던 수고가 아까워 두꺼운 책을 덮지 못할 때처럼, 나는 미련을 가진 체 이곳에서 생활을 이어 갔다. 작은 클로벨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했다고 할까. 여행과 일상 사이의 경계선이 희미해지면서 천천히 흥미를 잃었다.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영국까지 와서 여행한 곳이라곤 런던과 클로벨리, 찰나의 콘월주밖에 없었다. 3주라는 긴 시간을 만리타국에서 보내는 것치곤 살짝 아쉬웠다. 이색적인 경험은 충분히 했는데 보편적인 관광이 부족했다. 적적한 호스트 마을을 떠나 이름난 곳에서 사진을 찍고, 호스텔에 머물며 또래 친구를 사귀고, 쇼핑과 외식을 하고 싶었다. 런던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큰 도시에 잠깐 들려서 말이다.


  이곳에 오기 직전, 하필이면 이탈리아 돈자니 신부를 만났다. 행복의 정점에 섰던 그때와 비교하면, 이곳은 행복의 내리막길이랄까. 두 경험은 노동이라는 측면에서 정반대였다. 놀고먹기만 하다가 고된 농장 일을 하려니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그래도 처음 며칠간은 버틸만했다. 새로운 경험은 늘 보람차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일주일 만에 지루해졌다. 더는 배울 게 없다고 스스로 판단할 정도였다.


  게다가 심한 감기까지 걸렸다. 일할 때는 물론, 잠자리에서도 추위와 씨름했다. 한겨울에 외풍이 얼마나 세던지. 수의 경고가 사실이었다. 그녀는 내가 도착하기 전, 혹독한 날씨에 대해 주의를 시켰다. 나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라고 여겼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 아닌가. 냉탕에 들어가는 순간 오두방정을 떨지, 막상 몸 전체를 담그면 괜찮다. 날씨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하루 이틀 정도 벌벌 떨겠지만, 금세 적응할 거라 믿었다. 크나큰 오산이었지만.


  개인 여행·고된 노동·혹독한 날씨. 세 가지 원인이 모였다. 결국, 예정보다 일찍 떠나겠다고 바트와 수에게 말했다. 떠나는 이유를 모두 말하진 않았다. 런던으로 가는 길, 브리스틀(Bristol)에서 마지막 여행을 하고 싶다는 말밖에는.


  떠날 때가 다가올수록 정을 쌓기보다 정리하는 일에 초점을 뒀다. 새로운 장소를 탐험하지 않고, 이미 갔던 곳을 한 번 더 갔다. 당나귀에게도 이별을 예고했다. 그들은 두 눈을 끔뻑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다시 미련이 생겼다. 고달픈 생활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준 존재는 다름 아닌 당나귀 가족이었다. 날이 지날수록 녀석들을 향한 애정은 커져만 갔다. 그렇다고 열여덟 당나귀의 이름을 모두 외운 것은 아니다. 유독 애정이 가는 친구가 있었고, 눈에 띄지 않는 친구도 있었다. 그중 가장 애착이 가는 녀석은 노새 루퍼트(Rupert)였다.


  노새는 엄밀히 따지면 당나귀가 아니다. 수탕나귀와 암말 사이의 잡종이다. 당나귀라 하기엔 키가 크고 날씬하다. 말이라 하기엔 땅딸막하고, 귀와 꼬리가 나귀를 닮았다. 내가 보기엔 루퍼트는 그저 거대한 강아지 같다. 내가 건초를 쓸고 있을 때마다 소리 없이 다가와 거대하고 길쭉한 뺨을 내 어깨에 비볐다. 이럴 때면 기특하기도 하면서 참 무섭다. 내 몸무게보다 무거운 동물이 먼저 비비적대는 일은 아무래도 낯설기만 하다. 


  루퍼트는 외롭다.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다른 당나귀로부터 왕따를 당한다. 하지만 절대 기죽지 않는다. 말의 유전자가 섞여 있어 쾌활하다. 가만히 서서 건초를 뜯거나 멍을 때리는 다른 당나귀와 달리, 루퍼트는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틈만 나면 친구들에게 애정 표현-혹은 장난인지 모르겠으나-을 한다. 돌아오는 건 뒷발차기뿐.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얻어터진다. 그래도 기죽지 않고 또 다른 당나귀한테 달라붙는다. 퍽! 한 번 더 맞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루퍼트에게 마음이 쏠렸다. 덩치만 친구들에 비해 크지, 실상 나이는 가장 어렸다. 수에게 당나귀 농장에 왜 노새가 있는지 물었더니, 버림받은 녀석을 데리고 왔단다. 이렇게 잘생긴 노새가 왜 버려졌을까. 외롭게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꼭 나를 닮았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한 마리의 노새로부터 인생을 공감하게 될 줄이야.

노새 루퍼트, 온순하고 애교 많은 녀석이다. 나는 루퍼트의 아랫입술과 턱을 만져줄 때 참 기분이 좋았다. 고양이 발바닥을 만지는 느낌이랄까. 특별히 허락받은 느낌?!


지금 읽고 계시는 브런치북을 통해서

이 책의 프롤로그&목차 3(영국: 나의 첫 반려동물은 당나귀) 원고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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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자분들께 가장 먼저 책과 선물을 배송해드린 뒤, 이후 동네책방에 입고(5월 예정)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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