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에세이 <해마다 떠났어 반겨줄 곳이 있으니까>의 샘플원고
독립출판 여행 에세이 <해마다 떠났어 반겨줄 곳이 있으니까>의 샘플원고입니다.
프롤로그와 목차 3(영국: 나의 첫 반려동물은 당나귀)을 먼저 만나보세요!
영국 최남단 콘월주, 바로 위에 호스트가 사는 데번주. 이 두 지방만 놓고 보면 삼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반도다. 여기에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사우스웨스트 코스트 패스(South West Coast Path)가 있다. 마치 제주도를 걸어서 한 바퀴 돌 수 있게끔 만들어진 올레길처럼, 사우스웨스트 코스트 패스는 영국 최남단을 이어주는 해안 트래킹 코스다. 그 길이는 무려 1,000km 정도 달하며 공교롭게도 클로벨리 마을 옆을 지난다.
날씨가 좋았다면 장비를 빌려 도보 여행을 떠났겠지만, 아쉽게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한겨울이었다. 매일 아침 일기 예보를 확인하는 일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오늘도 비, 내일도 비였다. 여기 주민은 자연스럽게 크고 작은 우울증을 달고 살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불행한 날씨만 이어지는데, 긍정적인 생각이 과연 떠오르기나 할까. 나쁜 마음을 먹기 딱 좋은 기후 조건을 가졌다. 어쩌면 괜한 걱정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비를 맞다 보니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클로벨리도 그렇고, 런던도 그렇고. 여기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산을 안 쓴다. 영국 하면 떠오르는 신사. 그들은 항상 정장 차림에 장대 우산을 지팡이처럼 들고 다니지 않던가. 실상 눈을 씻고 찾아봐도 우산 든 사람이 드물었다. 보슬비라면 이해하겠지만, 비바람이 몰아쳐도 모자 하나 쓰고 끝이다. 짐작건대 비를 싫어한다면 반드시 우산을 들고 다닐 테다. 홀딱 젖기 싫을 테니까. 물론, 비를 아주 좋아해서 온몸으로 만끽한다고 볼 수도 없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대기 오염이 없어서 그럴까. 바트와 수에게 물어봐도 어렸을 때부터 우산 쓰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는데, 도통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날씨 속에서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이날 아침에는 여느 때처럼 기상 알람에 깨지 않았다. 햇빛이 나를 깨웠다. 엄마가 학교에 가라며 커튼을 걷었을 때 느껴지던 때 이른 눈부심이었다. 긴 시간 동안 세상을 청소한 뒤 떠오른 햇살은 그 어느 때보다 반가운 존재였다. 창밖에는 익숙한 듯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분명 같은 장면이었지만, 먹구름이 아닌 태양 아래에서는 다채로운 색조를 띠었다. 동시에 솟구치는 엔도르핀. 이런 날씨에는 도저히 일할 수 없었다. 나는 황급히 수에게 선언했다. 오늘 하루는 무조건 쉬어야겠다고 말이다.
오랜만에 여행 속 여행을 떠났다. 간단히 생수와 간식을 싸 들고, 곧장 사우스웨스트 코스트 패스로 갔다. 산과 바다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환상적인 트래킹. 그 속에서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봤던 해안 절벽이 해안선을 따라 병풍처럼 끝없이 펼쳐졌다. 그 사이에 중간은 없었다. 파도가 치는 바닷가 아니면 가파른 절벽만 존재했다. 마치 해적의 침입을 막아 내기 위해 오랫동안 공들여 쌓은 장벽 같다고 할까. 누가 보초를 서지 않아도, 적들은 절벽을 오르다 태반은 미끄러져 다칠 사정없는 낭떠러지였다. 이 거대한 광경을 클로벨리에서는 일상처럼 볼 수 있다니. 여행과 일상을 뒤섞어 놓은 오묘한 맛이 났다.
하루는 저녁을 먹다 수가 물었다.
“윤. 너는 왜 데번주까지 온 거야? 런던 근처에 머물러도 충분할 텐데. 이렇게 멀리까지 내려올 필요가 있었어?”
“아, 그거요? 다 이유가 있죠. 사실 영화 때문에 여기 왔어요. 어바웃 타임이라고. 그 영화 배경이 콘월주거든요.”
“어바웃 타임? 글쎄, 우리는 잘 모르겠네. 그러면 콘월주에 가지 왜 데번주에 왔어?”
“콘월주에는 호스트를 못 구했어요. 그래서 데번주에 있는 호스트들에게도 메일을 보냈고요. 무엇보다 당나귀 농장이 눈길을 끌어서 왔죠. 뭐. 하하하”
차마 당신들이 나를 받아준 유일한 호스트여서 마지못해 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콘월주에 우리 부모님이 계시는데. 언제 날 좋을 때 같이 가 볼까?”
뜻밖의 콘월 여행이 밥을 먹다 말고 튀어나왔다. 예산 부족에 시달리고 겨울 추위에 또 한 번 시달리며 다른 여행은 깔끔하게 포기했는데, 이게 웬 횡재인가? 비록 영화 촬영지를 방문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지역을 간다는 자체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했다.
도착한 수의 부모님 댁. 나는 간단히 인사만 드리고 집을 나왔다. 수도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인데, 그녀의 부모님이라니. 딱히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한정된 시간 안에 콘월을 만끽하고 싶은 욕심이 앞섰다. 나는 모처럼 명절을 맞아 할아버지 댁에 온 어린 소년처럼 탐험을 시작했다.
콘월은 클로벨리의 몽돌 해변과 달랐다. 이곳은 드넓은 모래사장을 가졌다. 겨울치고 관광객도 꽤 있었다. 저 멀리 초록 언덕 위에 줄지어 선 주택. 아마 이곳 주민들은 어정쩡한 남쪽 데번주보다는, 차라리 영국 최남단에 살고 있다는 타이틀이 더 좋아 정착했을지도 모른다. 절벽 위에서 그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마침내 도착한 콘월주. 영국 여행의 최종 목적지였다.
영국 남단에 온 이유는 오로지 좋아하는 영화 때문이었다. 당나귀 농장을 선택한 것도, 먹구름 속에 갇힌 것도, 모두 그 연장선이었다. 생각해 보면 여행의 목적과 장소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와 같이 자잘한 일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는 감명 깊게 읽은 책 때문에 남미를 꿈꾸기도 하고, 유튜브 동영상이나 인스타그램 사진을 보고 유럽행 항공권을 끊기도 한다. 큰 결정을 내리는 것 치고는 이유가 사소하다. 어쩌면 충동적인 선택이었다고 나중에 자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래 드 보통의 여행 에세이 <여행의 기술>에서 저자는 말한다.
‘그런 사소한 외국적 요소들이 강렬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 터무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다른 삶에서도 비슷한 양식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중략) 이런 자잘한 일에 영향을 받는다고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세밀한 것들도 그 속에 풍부한 의미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사소한 이유로 영국 남단을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일까. 내심 영화 속 낭만 가득한 이야기가 펼쳐지길 기대했지만, 현실은 시트콤. 비바람을 맞고, 추위에 떨고, 당나귀 똥오줌을 치웠다. 절벽 위에 서서 콘월 바다를 바라보니 지금까지 생긴 일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들은 예쁘게 차려입고 관광지를 떠도는데, 나는 작업복을 입고 마구간을 청소했다니.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못해 자랑스러웠다. 돈을 주고도 할 수 없는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영화 한 편을 따라 떠난 여행. 그 끝에 당나귀가 있을 거라고 어느 누가 상상했을까. 예상치 못한 호스트를 만나 예고에 없던 시나리오가 펼쳐진다. 이게 바로 사람을 만나는 여행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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