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에세이 <해마다 떠났어 반겨줄 곳이 있으니까>의 샘플원고
독립출판 여행 에세이 <해마다 떠났어 반겨줄 곳이 있으니까>의 샘플원고입니다.
프롤로그와 목차 3(영국: 나의 첫 반려동물은 당나귀)을 먼저 만나보세요!
유독 영국 하면 생각나는 음식이 잘 없다. 피시앤칩스(Fish&Chips)가 있긴 한데 이걸 요리라고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평범한 생선가스를 감자튀김과 내어 주는데, “이게 영국의 대표 음식입니다”라고 말한다는 건 그만큼 다른 음식이 형편없음을 방증하는지도. 물론 피시앤칩스, 맛은 있다. 바삭한 튀김 가루를 입힌 촉촉한 생선살과 포슬포슬한 식감이 예술인 감자튀김, 삶은 완두콩에 저마다의 비법으로 만든 소스까지 곁들여 먹으면 그야말로 저렴하고 배부른 서민 음식이다. 아, 영국 물가 대비 저렴하다는 말이지 식당에서 먹으면 2~3만 원 정도 한다. 다른 나라에서 저렴한 스테이크를 사 먹을 돈으로 영국에서는 생선가스를 먹는 셈이니 가성비가 형편없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런던에 짧게 머물면서 몇 가지 다른 음식도 시도해 봤지만, 대부분 비싸기만 했다. 차라리 홍차와 밀크티, 당근 케이크를 파는 카페가 한국보다 싸고 맛도 일품이었다.
집밥은 어떨까. “너는 영국 가면 허구한 날 감자만 먹을걸?”이라는 친구들의 빈정거림이 사실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고된 일을 매일 해내는 노부부에게는 분명 비결이 있을 거다. 먹은 만큼 힘쓰는 게 지당한 논리니까. 한국 농촌에서 일하다 말고 달콤한 새참을 맛보는 것처럼, 이곳에도 특별한 음식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노부부의 음식은 턱없이 부족했다. 맛이 없다는 게 아니라 양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아침 열 시에 토스트 네 쪽을 먹고 나면, 다음 식사가 무려 밤 열 시에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난 야밤에. 그사이에는 오직 티타임이라고, 차를 마시고 쿠키 먹는 시간만 있을 뿐이었다. 바트와 수에게는 이 간식이 점심을 대신했다. 열여덟 당나귀의 저녁밥을 일일이 챙겨줘야 하므로 본인들의 저녁 식사는 그만큼 늦어졌다.
도대체가 어떻게 된 일인지. 나도 나름대로 멀리서 온 손님인데, 이렇게 대우하나 싶었다. 막말로 당나귀보다 못한 처지 아닌가. 아침으로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아침은 식빵이 다였고, 점심은, 아니 티타임은 차와 쿠키 몇 조각이었다. 농장에서 일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열량.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어도 그 이상의 음식이 필요하다. 매일 같이 당나귀 똥오줌을 치우는 중노동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오직 나를 위해 점심을 만들어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노부부의 삶은 바쁘고 궁색해 보였다. 둘이서 당나귀 열여덟 마리를 돌보는 일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수입이 충분한 것도 아니었다. 농장 입구에 놓인 상자에 기부금을 받는 형식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때로는 어린이 대상으로 당나귀 체험 행사를 운영하며 부수입을 얻었다. 휴가철이 아니라면 수입이 바닥 나는 사업. 이곳이 사시사철 관광객으로 북적였으면 좋겠지만, 현지인 사이에서 알음알음으로 알려졌을 뿐 항상 조용했다. 어수선한 장소를 싫어할 법한 사람만 방문할 그런 마을. 과연 휴가철 동안 바짝 벌어둔 수입으로 보릿고개를 버틸 수나 있을까.
사정을 알고 나니 더 많은 음식을 요구하는 게 오히려 미안했다. 여행자가 일한 만큼 음식을 제공해야 하는 호스트의 의무가 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따로 시간을 내어 점심을 만드는 일은 그들의 생활 방식에서 불가능해 보였다. 나 역시 이대로는 배가 고파 일을 할 수 없었다. 생존이 걸린 문제다 보니 필사적으로 묘안을 짜냈다.
“바트. 저 너무 배고파요. 점심 없이 일하는 건 진짜 무리에요. 차라리 저녁을 만드는 김에 1인분만 더 요리해 주시면 안 될까요? 다음 날 점심으로 데워 먹게요.”
3인분이나 4인분이나, 요리할 때는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트는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마침내 끔찍한 굶주림에서 탈출했다. 그전까지는 너무 배가 고파서 저녁을 폭식한 뒤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배는 고프고 몸은 고달프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어찌나 속이 불편하던지. 소화할 시간도 없이 침대에 누워 버리니 숨쉬기가 거북해 잠을 설쳐 댔다.
바트가 요리하는 영국식 집밥. 양이 부족해 문제였지 아주 맛있었다. 으깬 감자나 쌀밥에 구운 고기와 채소를 곁들이는 게 다였지만 충분했다. 한 끼를 더 부탁한 뒤로는 모자람이 없었다. 덕분에 맛없기로 소문난 영국 음식에 대한 오해를 어느 정도 풀었다고 할까.
돌이켜보면 항상 배가 고파 어떤 음식이든 맛있게 먹을 수밖에 없던 환경이었다. 만약 내가 대학교 생활을 하며 바트의 집밥을 먹는다면? 미안한 말이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저렴한 학교 식당만을 이용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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