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에세이 <해마다 떠났어 반겨줄 곳이 있으니까>의 샘플원고
독립출판 여행 에세이 <해마다 떠났어 반겨줄 곳이 있으니까>의 샘플원고입니다.
프롤로그와 목차 3(영국: 나의 첫 반려동물은 당나귀)을 먼저 만나보세요!
이튿날 아침 아홉 시쯤에 눈을 떴다. 밤새 전기장판으로 등판은 따뜻했지만, 창문 틈으로 차가운 바닷바람이 조금씩 들어와 얼굴과 귀가 무척 시렸다. 두꺼운 이불을 얼굴까지 덮고 잘 수도 없는 노릇. 차라리 베개를 위쪽으로 치워 전기장판의 온기를 뒤통수로 오롯이 빨아들였다. 그래도 귀가 시려 새우 자세로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며 얼굴을 반쪽씩 데웠다. 아마 한동안은, 어쩌면 여기를 떠날 때까지 추위와 계속 싸울 것이다. 아랫도리에는 내복과 바지를 두 겹으로 입고, 윗도리에는 긴 옷과 오리털 패딩을 겹쳐 입은 채로.
아침 식사는 간단한 토스트와 차였다. 투박한 식빵을 냉동실에서 꺼내 오븐에 구웠다. 바트와 수는 두 쪽씩, 나는 네 쪽을 집었다. 식탁에는 재활용한 유리병에 담긴 과일잼이 몇 개 있어 기분에 따라 버터와 함께 발라 먹었다. 아무래도 토스트에는 빨간 잼이 잘 어울린다. 딸기잼은 아니었지만 빨간 열매 계열의 새콤달콤한 맛이었다. 차는 주전자에 수돗물을 받아 끓인 뒤, 붉게 녹이 슨 원형 깡통 속 말라비틀어진 찻잎을 넣어 만들었다. 한국에 있을 때 카페 메뉴를 보면 잉글리시 브랙퍼스트(English Breakfast)라는 차가 있었는데, 왠지 그런 느낌이랄까. 말 그대로 영국 아침의 맛. 찻잎이 싸구려든 아니든 설탕 한 숟갈 넣어 마시면 입에 착착 감겼다. 집안에서도 입김이 날 정도로 추우니, 몸을 녹여 주는 따뜻한 차 한 잔의 효과가 실로 엄청났다.
오전 열한 시쯤 돼서 당나귀 농장으로 출발했다. 여전히 흐리멍덩한 하늘 아래, 무언가 체념한 표정의 당나귀들이 가만히 서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비유하자면 다들 표정이 없었다. 주인이 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 오직 눈만 껌뻑일 줄 알고 꼬리만 흔들어 댔다. 그 동작만 내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반복했다. 당나귀라는 동물은 감정 표현의 세계에서 가장 절제된 동물이 아닐까 싶다. 대신 울음소리가 인상적이다. 멀리서 들으면 분명 소 따위의 덩치 큰 동물을 도살하고 있겠구나, 하고 느낄 신경질적인 고음이다. 수는 먹이 16인분을 준비하면서 당나귀들이 배고파서 우는소리라고 했다. 집 마당에 있는 두 마리까지 합쳐, 모두 열여덟 마리. 노부부 단둘이서 당나귀 대가족을 돌보았다.
당나귀가 사는 세계도 사람 사는 세계와 제법 비슷하다. 항상 밥을 먹을 때면, 늙어 몸이 아픈 당나귀는 다른 혈기왕성한 당나귀들과 떨어진다. 딱 한 마리씩 들어갈 수 있는 독립된 공간에서 노쇠한 이는 가루약이 뿌려진 사료를 혼자 우걱우걱 먹는다. 반면 어린것들은 마당이나 다른 공동 공간에서 건초더미를 후다닥 나눠 먹는다. 젊고 건강하면 공동생활을, 늙고 나약하면 어느 정도 독립된 공간이 당나귀에게도 필요하다.
밥을 먹으면서 동시에 굵은 대변이 엉덩이에서 툭툭 떨어진다. 당나귀 똥은 한 알 한 알 맹글어진다. 생김새도 커피 원두처럼 생겼다. 크기는 어린이 주먹만 하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동글동글한 게 귀엽기도 한데, 어쨌든 내가 치워야 하는 골칫거리. 그런데 똥 치우기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하는 일 중에 가장 힘들고 비효율적이었다. 자갈 바닥 사이로 스며드는 똥은 마치 아몬드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이 사이로 부스러기가 끼었을 때처럼 쉽게 빠지지 않았다. 도대체 왜 바닥을 편평한 시멘트로 덮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클로벨리 마을의 역사를 살짝 봐야 한다.
클로벨리는 검은 몽돌로 유명하다. 모래사장 없이 크기가 제각각인 까만 자갈만 해변에 잔뜩 깔려있다. 이 농장이 설립된 1889년 당시-아마 그때는 시멘트가 없거나 비쌌을 것이다-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검은 몽돌을 이용해 바닥을 다졌다. 당나귀 농장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의 보도블록이 올록볼록한 몽돌이다. 하이힐을 신거나 바퀴 달린 가방을 끌고 다니기 아주 불편하다. 나는 작업화로 굽 낮은 장화를 신었기 때문에 길 위를 걸을 때마다 자갈의 윤곽을 하나하나 느꼈다. 지압판 위를 걷는 느낌이랄까. 건강에도 좋고 당나귀 똥이 스며들기에도 딱 좋다. 쓱싹쓱싹. 틈 사이로 파묻힌 똥은 칫솔 짓 하듯 플라스틱 빗자루로 파내야 했다. 누가 싼 똥을 다른 당나귀가 밟으면 발굽 사이사이로 나쁜 물질이 끼어 부패가 시작될 수 있다나. 그래서 똥이 보이기만 하면 부지런히 치워야 했다. 그야말로 똥과 싸움이었다.
더러워진 건초 더미도 말썽이었다. 마른 풀은 당나귀의 음식이 될 뿐만 아니라 그날그날의 포근한 잠자리가 되었다. 사람처럼 당나귀도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서 잠들 수 없나 보다. 그런데 문제는 뽀송뽀송한 건초 더미 위에 당나귀가 똥오줌을 지렸다는 것이다. 하룻밤 사이 기분 나쁘게 축축해진 당나귀들의 잠자리. 나는 농장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더러워진 건초를 갈퀴로 끌어모아 네모난 플라스틱 통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러곤 농장 한쪽에 놓여있는 거대한 수레에 쌓아 버렸다. 그것도 최대한 정갈하게. 한정된 수레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테트리스 하듯 차곡차곡 공을 들여야 했다. 건초 더미가 쌓일수록 냄새는 한층 지독해졌다. 치명적인 암모니아 냄새는 깨끗이 비누칠해도 손끝에 항상 남았다.
냄새도 냄새지만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건 추위였다. 이곳 날씨는 런던보다 심각했다. 온종일 거센 바닷바람이 미세한 물방울과 함께 내 뺨을 때렸다. 그게 바닷물이었을까, 아니면 빗방울이었을까. 장화를 신고 우비를 입어도, 그 사이에 있는 허벅지는 늘 기분 나쁘게 젖어 들었다. 옷소매 끝자락도 마찬가지. 똥오줌을 치우다 보면 우비 밖으로 튀어나온 소매 끝에 알게 모르게 오줌이 묻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싶어도 추운 날씨 앞에서는 어떻게든 노출되는 신체 부위를 줄여야 했다. 그렇게 나는 불쾌하도록 축축해졌다. 도망가고 싶기도 하고, 여기까지 와서 뭐 하는 짓인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추위와 악취에 시달리다 보면 그만둘 법도 했다. 그런데 쌓이는 스트레스 이상으로 당나귀에 대한 애정이 솟아났다. 이들은 강아지처럼 나를 반겨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양이처럼 이따금 찾아와 주지도 않는다. 그저 배가 고프면 울어 대고, 가끔 자기네들끼리 서로 핥아 주며, 건초 더미에 누워 있다가, 물을 마시다가, 지푸라기를 오물오물 씹다가, 특식으로 내준 나뭇가지를 와작와작 씹어 먹다가, 시도 때도 없이 똥오줌을 갈긴다. 또, 냄새는 어떻고. 혹시라도 말 근처에 가 본 사람은 공감할 테다. 아니면 런던 버킹엄 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에 가 본 사람이거나. 그곳이 동물원이든 어디든, 말이랑 당나귀한테 똑같이 나는 역한 냄새가 있다.
하지만 내 후각은 빠르게 적응했다. 역겨웠던 일이 일상처럼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살면서 동물과 함께 지낸 적이 있었을까. 아파트에서는 동물을 기를 수 없었고, 자취방에서는 홀로 살기도 벅찼다. 그런 내게 첫 반려동물은 당나귀다. 더러운 똥이나 오줌에 젖은 건초 더미를 치우는 일에 점점 무뎌지다니. 나는 당나귀들의 동반자가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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