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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여행자 Mar 17. 2020

한겨울의 바닷가 마을

여행 에세이 <해마다 떠났어 반겨줄 곳이 있으니까>의 샘플원고

독립출판 여행 에세이 <해마다 떠났어 반겨줄 곳이 있으니까>의 샘플원고입니다.

프롤로그와 목차 3(영국: 나의 첫 반려동물은 당나귀)을 먼저 만나보세요!


한 겨울의 바닷가 마을


  유럽 여행 마지막 워크어웨이는 데번(Devon)주에 있는 작은 해안가 마을, 클로벨리(Clovelly)의 당나귀 농장에서 진행됐다. 영국 최남단 콘월(Cornwall)주가 전라남도면 데번주는 전라북도쯤 해당한다. 런던에서는 남동쪽으로 다섯 시간 정도 차를 몰고 가면 만날 수 있다. 물가 비싼 영국에서 호스트 마을까지 찾아가는 교통비도 만만치 않다. 돈과 시간을 모두 소비해야 하는 ‘고통비’가 아프게 비싸다.


  영국 최남단을 고집한 이유는 바로 ‘어바웃 타임(About time)’이라는 영화 때문이다. 이 영화는 시간 여행자의 사랑과 인생에 대해 다루는 내 평생 최고의 작품이다. 직접 대본까지 인쇄해서 외우고 다닐 정도로 열광적인 팬이다. 영화 속 배경은 콘월주. 정확히 어떤 마을 어느 장소에서 촬영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너무나도 가 보고 싶었다. 마치 그 지역에만 가면 영화 같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일찍이 콘월주의 몇 없는 호스트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어 데번주의 호스트들에게도 연락을 돌렸다. 얼마 뒤 당나귀 농장을 운영하는 노부부가 응답했다. 당나귀? 분명 흥미진진한 경험이 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주말을 이용해 가까운 콘월주를 방문할 수도 있을 테니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굵은 빗발이 날리는 어두운 겨울밤, 런던에서 출발한 고속버스는 남동쪽으로 달려 비드포드(Bideford)에 멈췄다. 여기서 호스트를 만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20분이나 지났지만, 호스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괜히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만 쳐다보며 ‘당신이 제 호스트인가요?’라는 무의미한 눈짓만 던질 뿐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플랜 B를 만들었다. 호스트를 찾아가는 초행길은 아무래도 늘 불안하기만 하다.


  이윽고 지붕 높은 하얀 승합차가 맞은편에 멈춰 섰다. 호스트 차였다. 앞쪽에는 운전석과 조수석을 포함하여 두 명, 혹은 마른 사람이면 세 명만 탈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뒤쪽 트렁크에는 농기구가 가득 실렸을 법한 화물용 자동차였다. 운전석에서 호스트 바트(Bart)가 내렸다. 우리는 빗속에서 첫 악수를 한 뒤 여행 배낭을 트렁크에 싣고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장대비가 내리고 있어 차 안은 투둑투둑, 무거운 빗방울이 철판 지붕을 두들기는 소리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와이퍼 소리로 가득했다. 꽤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았는지 좌석 시트에는 메마른 지푸라기가 듬성듬성 붙어 있었다. 그리고 물씬 풍겨오는 퀴퀴한 냄새. 동물을 기르는 집이라면 날 수밖에 없는 특유의 털 냄새였다.


  미안한 말이지만, 바트는 플라스틱인지 자연 그대로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거친 회색 머리털만 두상 양쪽에 조금 남겨 두고 있었다. 중간부터 머리가 하나둘 빠지기 시작해 지금의 아인슈타인 같은 머리 모양을 가졌나 보다. 그 아래 유독 눈에 띄는 숱 많고 진한 눈썹, 강렬한 눈, 짙은 회색 콧수염. 코밑을 제외하고 전부 면도하는 것 같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농장 일을 하는 어르신에게는 매일 아침 면도할 이유가 전혀 없으리라.


  그의 목소리는 남자답게 생긴 얼굴과 달리 높은음이었다. 바닷가에 살아서 그런지 목 깊숙한 곳에서 성난 파도처럼 높고 거친 소리가 들렸다. 또,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특유의 억양이 있었다. 아직은 적응하기 힘든 영국 방언. 세찬 빗소리에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아 의사소통하는 데 애를 먹었다.


  우리는 먼저 당나귀 농장으로 갔다. 늦은 밤이었지만 농장에는 아내 수(Sue)가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칠 줄 모르는 비. 바다를 옆에 끼고 있어 바람도 강하게 불어 댔다. 난생처음 본 당나귀는 안쓰러웠다. 이 가여운 동물은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빗방울에 축축해졌다. 바트와 수는 당나귀를 한 마리씩 몰아 실내로 들여보냈다. 당나귀들에게 늦은 저녁을 챙겨 주는 것으로 일과는 마무리. 우리는 다시 좁은 흰색 승합차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빗소리보다 사람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노부부의 집은 농장에서 차로 10분 거리였다. 차에서 내리니 나무 기둥을 깎아 만든 낮은 대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외부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있다기보단, 집 마당에 대문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만들어 놓은 엉성한 출입문이었다. 이윽고 2층짜리 하얀 목조 주택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에 비쳐 유독 음산한 집. 족히 30년은 넘어 보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왼쪽에는 세탁실이, 오른쪽에는 주방이 있었다. 물건을 둘 수 있는 공간에는 하나같이 오래된 우편물과 깨진 식기류, 지저분한 작업복, 재활용하려고 모아 둔 쓰레기가 너저분했다. 뭔가 정리정돈은 한 것 같은데, 근본적으로 물건이 많아 소용없다는 식으로.


  주방을 지나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는 다시 거실과 작업실, 화장실로 이어졌다. 모든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있어 신발을 신고 다니기 미안했다. 심지어 화장실까지. 물청소를 포기한다는 셈인가. 한편, 내 방은 위층에 있는 손님방이었다. 두꺼운 이불과 전기장판이 깔린 침대, 책상, 은은한 전등이 딸린 꽤 널찍한 공간이었다. 남향으로 튼 창문 사이로는 바닷바람이 내가 반갑다는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침투했다. 젠장, 외풍이다. 집 전체가 난방되지 않으니 전기장판은 최소한의 생존 수단이 될 테다.


  기분 탓일까, 날씨 탓일까. 지난 스위스와 이탈리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약간 팔려 온 일꾼 같은 느낌도 살짝 들고, 무엇보다 적막했다. 다른 여행자 없이 집 안에는 호스트 부부와 나까지 셋만 지낸다. 서로 왕래가 없던 친척 집에 한동안 신세를 지는 듯 살짝 불편했다. 다만,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당나귀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껏 한 번도 동물과 오랫동안 교감한 적 없었던 나에게 새로운 경험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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