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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여행자 Mar 17. 2020

신사의 나라는 개뿔

여행 에세이 <해마다 떠났어 반겨줄 곳이 있으니까>의 샘플원고

독립출판 여행 에세이 <해마다 떠났어 반겨줄 곳이 있으니까>의 샘플원고입니다.

프롤로그와 목차 3(영국: 나의 첫 반려동물은 당나귀)을 먼저 만나보세요!


신사의 나라는 개뿔


  악명 높은 런던이었다. 누구는 우중충한 날씨를, 누구는 엄격한 입국 심사를, 누구는 값비싼 물가를, 또 누구는 맛없는 음식을 말했다. 실제로 런던을 마주하니 틀린 말 하나 없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런던이 좋다고 하는 거지? 그 우울한 여정은 런던 히스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됐다.


  런던의 입국 심사는 엄격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실제로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어떻게 하면 무사통과할 수 있는지, 어떤 질문을 하는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등 예비 여행자의 걱정 어린 질문이 가득하다. 


  ‘훗. 그런 건 여행 초보나 영어 울렁증이 있는 사람들이나 찾아보라지’.


  나는 코웃음을 쳤다.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단 한 번도 입국 심사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그만큼 여행길에서 배짱이 두둑해졌다.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출국 비행기 표와 숙소 예약 확인서가 있고 방문 목적을 단순 관광이라고 하면 어떤 입국 심사관도 토를 달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불법 체류자로 오해할 만한 여지가 없으니까. 늘 그렇듯 내 여권에는 입국 도장이 꾹 찍힐 테다.


  “언제 출국하실 거죠?”

  “2월 20일이요. 여기 출국 항공권이 있는데 확인해 보시겠어요?”

  “영국에서 계획이 어떻게 되죠?”

  “런던에 있으면서 관광을 하려고요.”

  “유럽에는 언제 어디로 입국했죠?”

  “작년 11월 독일에 처음 도착했는데요.”


  내 여권을 스캔하던 입국 심사관이 사무적으로 물었다. 그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차가운 질문만을 이어갔다. 어차피 모두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어려울 것도 없었다. 자국을 방문하는 관광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따위 없는 냉철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뭐 어쩌겠나. 무조건 숙이고 봐야지.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저는 절대 의심스러운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는 관광객입니다’라는 분위기를 뿜어냈다. 물론, 영국에서도 워크어웨이를 하기로 했지만,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 아무래로 ‘Work’라는 단어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할 테니까.

 

 “정확히 언제부터 유럽에 있었죠?”


  슬슬 입국 도장을 찍어줄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돌발 질문이 날아왔다.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3개월 전의 일이라 달력을 보지 않고서는 기억나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뭘 했죠? 어떤 봉사 활동이었죠? 왜 그런 봉사 활동을 했죠?”


  지난 11월 12일, 국제 워크캠프를 위해 베를린에 처음 입국했다. 난민 보호소에서 다국적 참가자와 함께 건물 보수 작업을 하는 건전한 일이었다. 도대체 내가 독일에서 뭘 했든 무슨 상관이람? 영국 입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질문-어디까지나 내가 생각하기로는-에 어이가 없었다. 워낙 입국 심사가 까다로운 나라라고 하니 정성껏 대답은 했다만, 내 대답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그는 대꾸조차 안 하고 자기 할 말만 계속했다. 그러곤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해댔다.


  “무비자 체류 기간 90일이 넘어요. 이렇게 되면 입국할 수 없습니다.”


  우선, 약간은 복잡한 유럽 솅겐 조약(Schengen agreement)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겠다. 이 조약에 가입한 유럽 국가를 여행할 때는 90일간 비자가 필요 없다. 가령, 나처럼 독일·체코·스위스·이탈리아·스페인· 포르투갈을 여행한다고 치자. 이 국가는 모두 솅겐 조약에 가입했기에 똑같은 나라로 여겨진다. 대신 한 나라당 최대 90일까지 지내는 게 아니라, 모두 더해 90일을 넘기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100일 일정이었기에 10일을 초과한다. 방법은 있다. 초과한 10일만큼 미가입국을 여행하면 된다. 그리고 아주 잘나신 영국이 솅겐 조약에 가입하지 않았다. (혹시 지금 유럽 배낭여행을 계획한다면 다시 한번 비자에 대해 알아보시길. 해마다 달라지는 게 정책인지라.)


  당시 아무리 인터넷을 검색해도 유럽을 비자 없이 90일 이상 여행한 한국인은 드물었다. 약간의 블로그 글이 있긴 했지만, 민감한 문제여서 완벽한 정보가 필요했다. 나는 주저 없이 외교부에 전화를 걸었다. 여행 계획과 무비자 가능 여부를 상담했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비자만큼은 절대 문제가 생길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체류 기간을 초과했다니.


  “작년 11월 12일에 입국했죠? 그러면 영국을 떠나기로 한 2월 20일, 이미 90일 체류 한도가 초과합니다.”

  “영국은 솅겐 조약에 가입하지 않았잖아요. 제 여행은 총 100일이고요. 3주 정도는 영국에 있어서, 솅겐 조약에 해당하는 유럽 국가에서는 모두 합해 90일 이상 머물지 않습니다. (이 답답한 양반아!)”

  “그럴 수 없어요.”

  심사관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연신 그럴 수 없다는 말만 거듭 반복할 뿐이었다. 

  “후- 좋아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봅시다. 유럽에 언제 어디로 입국했죠? 그러고 나서 어디를 갔죠? 영국에 오기 전까지 정확히 어떤 나라에 갔죠?”


  아니, 지금까지 잘 대답했는데, 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지? 이미 10분 이상 심사대 앞에 서 있었다. 내 뒤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악명 높은 입국 심사를 멀찌감치 구경하는 다른 관광객들로 차곡차곡 밀려있었다. 그들은 아마 속으로 ‘나는 저 동양 남자처럼 오래 걸리지 않겠지!’, ‘뭐 하는 거야 바보 같은 녀석. 왜 이렇게 우리를 기다리게 하는 거야?’라며 구경했을 거다. (혹시 무사통과를 기도하셨다면 제 오해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만큼 상황이 너무 답답했습니다.)


   “그럴 순 없어요. 그렇게 여행해서는 안 돼요.”


  아마 그 직원은 내가 단순히 솅겐 조약의 90일 한도를 피하려고 영국에 잠깐 들른 줄 알았나 보다. 일종의 편법으로. 일종의 눈속임으로. 그렇지만 나는 대한민국 외교부에 전화까지 해 가면서 완벽한 준비를 했다. 이건 편법이 아니라, 합법이었다. 자신 있었다. 틀린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그래. 어쨌든 내게 입국 도장을 찍어줄 수밖에 없어.’ 


  이 말을 속으로 얼마나 되새겼는지 헤아릴 수도 없다. 내가 옳다. 나는 떳떳하다. 그러니까 졸지 말고, 기죽지 말고, 끝까지 버텨 내라고 자신에게 속삭였다. 시간이 지나도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대답은 반복되었다. 둘 사이에 진전은 없었다. 결국, 그 직원은 마지못해 도장을 찍어 주었다. “이렇게 여행하면 안 돼요”라는 마지막 힐난과 함께.


  입국 심사만 15분 넘게 진행되었다. 그동안 등이 따끔거렸다. 내 뒤에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관광객의 시선이 느껴졌다. 따분한 대기 줄에서 구경할 수 있는 게 나 말고 더 있었을까. 하필이면 입국 심사대 수도 부족해 나를 병목 현상의 유발자로 만들었다.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서 있던 짧은 순간은 런던에 대한 첫인상을 완전히 짓밟아 버렸다. 신사의 나라는 개뿔.


  예기치 못한 고생에 정신 차리기 힘들 무렵, 스위스 루이스네 집에서 만났던 영국인 천재 요리사 안드레아스에게 이 일을 하소연했다. 마침 영국에도 왔고 이때가 아니면 안부 인사할 거리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랬더니 이 녀석, “뭐? 세상에. 내가 대신 진심으로 사과할게. 영국 사람의 무례한 태도를 용서해 줘.”라며 답장을 보낸 것이다. 비록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푸대접을 받았지만, 앞날은 두고 볼 일이다. 안드레아스 같은 착한 영국인도 분명 있을 테니까.



목차 미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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