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 Jeongseon Oct 24. 2024

너무 긴 여름과 너무 비가 잦은 짧은 가을의 기후정의

하늘이 잔잔히 흐려진다. 잠시 맑았다가 다시 흐려지는 하늘을 보며, 날씨에 민감한 사람들은 이 저기압에 자주 불편해하고, 나아가 아프기까지 할 것 같다. 왜 하늘은 이렇게 흐려지는 걸까? 턱을 괴고, 급하게 흐려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이 시간이 급격히 하강한 기온만큼이나 이상하게 느껴진다. 지금은 가을이기 때문이다.     



여름비는 생장을 돕지만, 가을비는 열매를 상하게 한다. 가을볕에 곡식과 과일은 건강하게 여물며, 건조하고 적당한 햇볕이 가을을 가을답게 만든다. ‘가을장마’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에 북상했던 장마전선이 완전히 물러나면서 발생하는 기후 현상일 뿐이다. 지금처럼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비가 자주 내리는 것은 아니다. 마르고 단단한 햇볕을 받아 기후로 인한 상처가 없는 과실이 있어야 가을은 풍요로운 계절이 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태풍이 비껴간 지난여름을 두고 우리는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걱정해야 할까? 눈앞의 피해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한반도를 거세게 지나가지 않은 태풍은 오히려 생태계에 불행한 일일 수 있다. 지나치게 무더웠지만, 비도 바람도 예전처럼 조화롭지 않은 답답한 공기는 분명 불행한 징조다.     

여름은 대부분의 시민이 공평하게 무더위를 느낀 시간이었지만, 가을은 조금 더 차별적인 두려움의 시간이 된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비는 낭만일 수 있지만, 갑작스럽게 떨어진 기온과 그 기온을 재촉하는 비를 맞으며 일하는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나는 처마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빗물에 미끄러지며 위태로운 곳곳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달리듯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정성을 다했으나 곰팡내 나는 결실을 바라보는 이들의 조마조마한 마음에 무심해질 수 있다. 여름 내내 더위와 싸웠지만 실질적인 비와 노동의 고통을 겪지 않은 나로서는 공감의 폭이 좁고 얕다.     



개인적으로 잊히지 않는 고사성어가 있다. “아복기포 불찰노기(我腹旣飽 不察奴飢)”. 내 배가 부르면 노비의 배고픔을 살피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 상황에 비추어 보면, 각자의 처지가 다른 만큼 체감하는 고통의 정도도 다를 수밖에 없고, 이는 무심함과 무정함으로 이어지기 쉽다.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이 나오는 직장에서 자가용으로 이동해 쾌적한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에어컨 없이 무더위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동일하게 느끼기 어렵다. 가을비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여름의 극단적인 차이는 그나마 드러나지만, 가을비가 만들어내는 사소한 차이는 더 큰 소외를 낳는다. 


         

올해 여름 태풍은 어떠한가. 태풍은 바다 표면을 휘저으며 해수를 뒤섞어 대기의 열을 흡수하고, 이를 통해 지구의 기온을 조절할 뿐 아니라 강수량을 증가시켜 가뭄을 완화하고, 산림과 대기의 먼지를 씻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 해 태풍이 평균적으로 200억 톤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데 이는 국가 수준의 연간 배출량을 상쇄한다. 또한 강한 태풍은 대기가 흡수하는 열량이 많아져 온실가스의 축적을 막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태풍은 이처럼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고, 기후 변화를 완화하는 중요한 자연 현상이다.     



그러나 이번 여름, 태풍다운 태풍이 없었기에 태풍이 지나가며 자연에 주는 혜택도 받지 못했다. 태풍은 바다와 공기를 뒤흔들며 탄소를 흡수하지만, 이번 여름 우리는 그러한 자연의 순환을 경험하지 못했다. 이어 다른 나라들이 거대한 태풍으로 국가 재난 수준의 피해를 겪었어도 우리는 그것을 쉽게 놓치고 잊어버렸다. 지나치게 길었던 여름을 걱정하면서도, 지나치게 비가 많은 가을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개인의 삶의 현재 상태와 관심의 거리감을 보여준다.   


  

‘빌려 쓴 미래’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미 기후는 가파르게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가며 지구 생태계가 불안한 상태다. 지켜야 할 미래와 미래의 인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 순간 지구 전역에서 무너져 가는 현재를 지켜야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를 앞당기는 그 어떤 것도 다국적 기업-세계에서 배출되는 탄소의 약 71%는 100개 다국적 기업에서 나온다는 보고-과, 국가 수준-이라크 전쟁 중 연간 약 5,500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 중소 국가 전체의 탄소 배출량과 맞먹는 수치-에서 만들어내는 탄소량을 이겨내지 못한다. 기후위기로 발생하는 재단은 먼저 기업과 국가를 규제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권에 초점을 두고서 다른 각도에서 이스라엘과 러시아의 공습을 바라 본다.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 시민에게 직접적 가해지는 온갖 비인권적 현장만으로도 인류를 향한 범죄의 극치가 바로 전쟁이다. 그리고 지구를 파탄 낼 정도의 가공할 만한 탄소 배출량을 생각한다면 전쟁은, 지금 당장 바로 모두 손을 내려놓고 멈춰야 하는 지구적 범죄의 극단에 있는 일이다. 또한 다국적 기업의 ‘계획적‧의도적 구식화’와 인류 전체를 강타 중인 총알 운송시스템은 담당하는 노동자의 삶-저소득 국가의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저임금 노동자 및 아동 노동 착취까지-을 갉아먹는 비인권적 범죄의 극치이기도 하다. 더불어 매년 인류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양의 탄소 배출량을 갱신함으로써 지구적 범죄의 극단에도 서 있다.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이 두 거대 조직의 행태는, 그 어떤 명분으로 감싸더라도 절대로 가려질 수 없는 범죄를 지속 중이다.     


재난은 낮은 곳, 가난한 곳, 소외된 곳부터 시작된다. 배가 고플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노비이지 노비를 부리는 양반이 아니다. 해서 재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기는 장소에 우연히도, 운 좋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노동자가 저지대 저소득 국가가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으로 파괴되고 있는 현실을 쉽게 잊을 수 있다. 지하 갱도의 카나리아처럼 죽음으로써 경고해 나가도, 신자본주의 논리로 이 상황을 지속하는 다국적 기업과 국가 조직이라는 거대 구조는 마치 “평평한 지구”를 맹신하는 이들이 도출해 낸 결괏값과 동일하게 행동한다. 가을의 초입마저 잡아먹도록 길었던 여름 무더위, 돌아서 비켜나간 태풍, 가을의 잦은 비와 급격히 하강한 기온을 바라보면 마치 갱도 속 카나리아의 다급한 지저귐이 들리는 듯하고, 카나리아의 위태로운 생명처럼 무겁고 무섭다.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의 작은사람프리즘>에 실렸습니다.   

이전 19화 한반도에서 건강한 노동자로 살아가기를 희망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