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여름 현재, 며칠 전에 쿠팡물류센터 노동자의 피해보상 관련해서 뉴스가 터졌다. 축구장 2배 정도의 공간에서 단지 두 명의 노동자가 오가며 일을 하다가 그 중 이제 스물일곱이 된 청년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상하 복층의 구조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옮긴 걸음을 단순히 숫자로만 계산했던 사측의 입장은 열악한 노동의 현실을 납작하게 표현한 상징적인 예가 되었다. 골프를 취미와 여가가 아닌 선수의 직업적 입장과 비교했다고 하더라도 물류센터 내 노동 강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하루 평균 취급하는 제품 또는 도구의 누적 중량이 250㎏ 이상일 때 과도한 업무라고 근로복지공단은 판단하고 있다고 한다. 포장 업무를 지원한 저 노동자의 하루 누적 중량은 ‘(수동 자키를 이용해) 하루 20~30㎏, 20~40회’, ‘(손으로) 3.95~5.5㎏ 물품 80~100회’ 운반했다고 한다. 4kg으로 80회를 잡으면 320kg, 20kg으로 20회를 계산하면 400kg, 최소한으로 잡아 더 덜어내도 합이 700kg이 넘는다. 과도한 업무의 3배에 가까운 중량을, 축구장 2배의 복층을 오가며 하루 2만 보가 넘는 걸음을 걸은 것이다. 이것이 과연 골프의 4시간 1만 5천 보와 비교 가능한 노동 영역이 될 수 있는가.
사망 전에는 일주일 내 6일 근무한 시간은 48시간인데 야간노동 30% 가산 시 62시간 10분으로 계산된다. 사측이 주장한 2만 보와 달리 그의 만보계에는 하루에 5만 보가 찍히기도 했다. ‘로켓배송’에 맞추기 위해 과로할 수밖에 없어서 인원 보충을 사측에 요구해도 묵묵부답인 현실이었다. 일용직 2년을 채우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붙잡고 버틴 세월의 결과가 과로사였다. 1년 4개월 보통 한 주에 5~6일, 19시에서 04시까지 일하다 2020년 급성심근경색으로 숨졌다. 살인적 노동환경이라는 말은 절대로 과한 표현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이렇듯 과로사로 죽어 나간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다. 4대보험 가입 방해나 화장실 출입 통제나 코로나 시기 확진자의 정상 출근은 이런 환경에서는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달 24일 발생한 화성 아리셀 참사 등 사업장 내 사망자의 사망 소식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1,850 /1,810 /1,777 /1,957 /2142 /2,020 /2,062 /2,080 /2,223 /2,016. 이 숫자는 2014~2023년 산업재해 사망자 수라고 한다. 정권과 상관없이 지속적인 연평균 노동자 사망자 2,000명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현재 5인 이상 사업장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이보다 더 열악한 환경의 소규모 사업장의 경우, 노동자의 사망은 집계되기도 힘든 현실이다. 그런데도 지난 4월 경영계는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 나라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노동자의 조건을 모조리 갖추고서도 개인사업자의 미명 아래 노동이 착취당하는 특수고용노동자와 영세사업자들의 고된 일상은 노동에서 노동자를 소외시키고 있다.
그뿐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는 은폐된 노동 현장이 더 잦고 심각하다. 지난 12일 경기도 포천, 10년 일한 태국 노동자(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야간에 돼지를 돌보거나 분뇨를 치우는 등의 업무하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의 시신을 유기한 농장주에게 2심에도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여름 폭염은 기후 위기로 인해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어도 땀이 흐르는 고온다습한 한반도의 여름은 이 자체가 생존을 위협할 지경이다. 이에 제주특별자치도는 폭염으로 인한 중대재해를 예방하고 근로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18일부터 31일까지 도 산하 사업장 및 발주공사 사업장을 대상으로 민·관합동 특별점검을 실시한다고 18일 밝혔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문제는 중대재해처벌법을 비껴가는 사업장과 영세한/특수고용된 개인사업자들의 환경이다.
노동하는 모두가 노동자라는 이 단순하지만, 확실한 명제를 붙잡고 노동 현장을 중앙 및 지방 정부부터 면밀히 살피고 관련 법률은 소외된 이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정되어야 한다. 제도부터 변혁된다면, 노동 착취의 편리를 이용하는 현장 자체가 차단된다면 시민에게 개인적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책임 전가하고 무마하고 마는 관행도 없어지지 않겠는가. 죽음의 외주화, 노동 소외가 이로 인한 참사가 반복되는 일상이 사라지길 바란다. 노동하다 죽지 않을 권리를 탄원할 필요가 없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이런 것을 꿈꾸는 사회는 얼마나 열악한 것인가. 묻고 싶다, 당신의 노동 현장은 안녕하십니까. 당신은 죽음의 노동으로부터 얼마나 안전하십니까.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