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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Oct 21. 2024

애도가 먼저다

심폐소생술은 고강도 노동이라 반드시 교대가 필요하다. 가슴 압박을 분당 100~120회, 5cm 이상의 깊이로, 온 체중을 실어서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깊게 실시한다. 엄청나게 힘든 작업이다. 촌각을 다투며 최대 각종 지원 동원돼야 하지만 가득 찬 인파로 인해 파고들 시간이 늦어지고 터무니없이 인력이 부족했던 초기 상황에 소방대원 및 경찰들 곁에는 시민들이 다가와 지원하고 있었다.

    

즉, 초반엔 계속 밀려드는 인파에 지원할 방법이 없었고 그 후엔 기록이라도 하려 했고 그 이후엔 여기저기서 손길을 내밀었다. 시민들의 자발적 움직임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거리엔 음악 소리로 가득했고 그 골목에 들어선 사람들은 3m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재난 문자가 와도 커다란 소란 속에서 확인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크다. ‘서양 명절에 나가는 사람들이 문제다’, ‘앰뷸런스 옆에서 춤을 추고 술 마시는 사람들이 문제다.’라며 비난하기 전에 그 거리에 대해 상상부터 해보길 바란다. 전파도 잘 안 터져서 문자 전화도 힘들었고 애초에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핸드폰을 가방이나 주머니에 방치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물며 3년 만에 마스크 없이 거리를 걸으며 축제를 즐길 시간을 맞이한 10~20대가 대다수였던 이태원 거리에서, 그들이 누리고 즐기고 싶었을 자유를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게 잔인하다.

     

각설하고, 참사를 맞닥뜨리고 개인의 관점에서 고통의 현장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행위가 사건화 될 문제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나는 사건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종 SNS를 통해 거름망 없이 유포된 영상과 글과 증언들을 일찌감치 봐버렸다. 이후 공적 조치와 뉴스 보도가 자세히 뿌려지는 과정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 사건의 기록이 트리거가 되어 고통을 호소하는 글들도 보았다. 나의 경우엔 고등학생 시절,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만원 버스에서 무겁게 몸을 짓누르며 성추행했던 이웃 학교 남학생의 기억이 소환됐다. 저곳에서 일어났을 참사 속에 묻혔을 수많은 고통이 떠오르고 압사 외에도 일어났을 수많은 일들이 상상이 돼 이내 아파졌다.


비록 지금 제주에 있음에도, 심폐소생술을 배워뒀던 터라 할 수 있다면 현장에 달려가 어떻게든 지원하고 싶은 마음만 컸다. 이내 현장이 봉쇄돼 시민은 돌아가란 지침이 내렸다는 것을 듣고 무기력에 참담했다.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노고를 느끼며 보면서 내가 본 무수한 시체를 떠올렸다. 죽겠구나. 의학적 지식이 없는 나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러나 거기 사람들은, 심지어 핼러윈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도, 늘어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심폐소생술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와중에 한 응급의가 SNS에 올린 글이 문제가 되었다. 이후 비대한 자의식으로 고통의 현장을 굳이 찾아가 애도하는 자신을 전시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인력이 부족했을 터였고 의료지식이 부족한 현장에 가야 한다는 응급의의 무의식적 의무감으로 이해했던 터라 나는 당황스러웠다. 가서 보아야 한다는, 어쩌면 지원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은 채 갔을 그의 마음을 행간으로 더듬으며, 응급실에서 본 아비규환과 겹치고 그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기억하자 하는, 그 고통 자체를 체화하려 했던, 생생히 기억하고자 하는 아픈 마음으로 이해했다. 그런데도 자의식이 가중된 그의 글을 비판하는 마음들도 이해하는데 모자이크 처리된 정제된 화면을 현장을 뒤늦게 본 이들의 이성적 판단에도 동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면 나는 어디쯤인 걸까. 자의식적 글쓰기가 문제라면 그는 소설가가 되는 게 나을까. 그의 글에서 카뮈의 <페스트>를 떠올렸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자아에서 자유롭지 못한데도 왜 그가 비통해하는 방식이 문제인 걸까. 이 상황을 접하고 공황발작이 왔다는 사람들의 글들은 애도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던가. 나 역시 고통과 슬픔이 신체화되는 과정을 새벽까지 맞이하며 겨우 쪽잠에 들었다가 다시 뉴스를 보고 절망했으나 내 고통을 게시글로 쓰지 않았으니 그러면 면죄부가 생긴 건가? 왜 우리는 개인과 개인에게 도덕과 윤리를 내세워 비난하기에 바쁜가. 지금 이 비상 상황에서 그걸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가거나 종교적 문제로 몰아가거나 정치적 문제로 몰아가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을 쳐내기에도 바쁜 마당에, 우리는 왜 이러고 있나.  

  

현재 진영별로 나뉘어 윤 박멸 문 만세의 사진들도 어이없다. 더구나 정치 조직화한 움직임들이 그들이 그토록 찬양하는 성스러운 주일에, 굳이 만들어서 각종 SNS에 뿌리고 있다는 게, 그들이 언제나 개인,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비난과 저주를 퍼붓는다는 점이 너무나 가증스럽다. 악은 정치세력화해 자본과 손잡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10만 명이 몰릴 거라 예상한 지방정부 측에서, 마약이나 성매매 단속만을 위해 200명의 인력만 배치한 것은 단언컨대 문제가 된다. 다양한 층위에서 비판받아야 하고 냉정하게 분석해서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매뉴얼이 만들어져야 한다.     


하여 비대한 자의식들이라는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비판할 여력이 내겐 없다. 다들 자신의 입장에서 아프다. 그걸 모아 모아서 그게 모여 모여서 하나의 큰 목소리가 된다. 결이 다르더라도 우리는 곁일 수 있다. 모든 것이 부질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도 다정의 힘을 믿는다. 아니 믿어야 한다. 지금 사랑하는 이들의 몸조차 찾지 못하고 애통해하는 이들에게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살아있음을 확인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시민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함께 울어야 한다. 그게 구원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지금 이 상황, 이 시점에서 개인을 향한 분노를 잠시 내려놓길 바란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산 자와 죽은 자, 그들을 사랑하는 자, 이 참사로 다시 떠오른 기억들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을 위로하며 슬픔에 동참하는 데 있을 것이다. 오늘 아침 이태원 핼러윈 축제 참사를 애도하기 위해 제주 신산공원 빛의 거리 축제를 잠시 멈췄다는 기사를 읽었다. 전국 곳곳에서 예정된 각종 행사가 멈추고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분노도, 비판도, 비난도 결코 애도보다 앞설 수는 없다. 정치인들이 애도를 빌미로 정치짓을 할 때, 그래서 애도조차 오염되고 찢길 때도, 시민의 애도를 막을 수는 없다. 애도할 권리는 인권이다. 애도가 먼저다.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에 게재된 것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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