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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Oct 19. 2024

차별화된 아름다움

잠들지 못해 뒤척이다 몸을 일으킨다. 이른 새벽에 커피를 마시며 밝아오는 아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불빛 켜진 아파트 사이 틈으로 길항하던 어둠은 물러나고 서서히 밝아지는 기운을 보면서 제주 조천 어딘가에서 본, 잊을 수 없는 여명과 노을과 비너스벨트를 떠올렸다. 같은 제주이지만 도심에서는 비너스벨트를 보기 어렵다. 아침이란 개념은 이렇듯 같으면서도, 지역이라는 구역도 이렇듯 유사하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조차 차별적이다. 삶은 절대 평등하지 않다,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여겼지만, 돌부리 같은 데 걸려 넘어지고서야 기이한 불평등의 추함을 상기하곤 한다.



2023년 4월 14일에는 “기후정의파업”이 세종시에서 열렸다. 전국의 시민 중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각종 행사와 행진을 하며 기후위기의 심각함을 알리고자 했다. 굳이 단체나 활동가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모인 사람들의 면면이 기후나 환경과 관련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장애인활동가도 있었고 페미니즘활동가도 있었고 청소년인권활동가도 있었고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수한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414기후정의파업 추진위원으로 후원했으나 여러 사정상 직접 가볼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후기로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면서 그날이 평일이었음에도 연차를 내고 기꺼이 하루를 반납하고 모인 사람들이 빛나고 있었다. 온라인에서, 책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공허한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현장에 나서면 상황은 달라진다. 혼자가 아니라는 깨달음만 해도 그건 엄청난 성과다. 추진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연이어 그해,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9주기였다. 세월호는 무수한 상흔을 남기며 침몰했다. 직간접 관계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모습을 지켜본 많은 사람은 상처를 입었다. 존 C. 머터의 『재난 불평등』에 잔혹한 인재로 세월호 참사를 언급했다. 여전히 교통사고 운운하는 사람들의 불평 섞인 잔인함 속에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참사’가 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언어의 빈자리를 생각했다. 이어 이 책을 수정 보완해 다시 출간한다면 여기에 “이태원참사”도 거론될 거라 확신했다. 8년도 안 되는 시간의 간격을 두고 우리는 사람을 잃었다. 살릴 수 있는 모든 근거를 가진 채로 사람이 죽어 나갔다. 지독하게 가난해서, 총칼을 든 독재정권이어서 참사가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공통적으로 젊은 청소년들이 주로, 소위 ‘놀러’ 가는 길에 생겼다.



그래서인지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사를 두고는 ‘서양 명절에 놀러 간 생각 없는 사람’이란 말이 나돌았고 세월호가 침몰할 때는 ‘가난한 것들이 웬 수학여행 놀러 가서’라고 놀려댔다. 숨 돌릴 틈 없이 청년들을 몰아붙이는 시대에 한숨 돌리러 놀러 가면 안 되는가, 가난하면 수학여행으로도 놀러 가면 안 되는가. 이러한 무수한 고민으로 더 괴로웠다. 노는 것에도 차별을 나누고 그에 따른 죽음도 차별했다. 때로는 이 나라 안에서 회자하는 말보다 외신이 더 정확할 때가 있다. 국내의 다양한 정치적인 개입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도 이태원도 비난하는 이들의 주장과 달리 ‘참사’로 보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저 무수한 차별 언어 아래서 갈피를 잃은 듯하다.     



다시 아름다움이 지닌 차별에 대해 생각한다. 소위 아름다움을 논할 때는 그것이 예술작품이거나 자연 풍광이거나 개인을 거론할 때가 많다. 묻고 싶다. 과연 거기에만 아름다움이 있을까. 살아가는 면면이 아름다울 수 없을까. 있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추하고 그걸 두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추악한 이 사회에서 아름다움이란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기후위기로 인해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계층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자연재해나 인재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계층도 역시 사회적 약자들이다. 여러 형태의 빈자들, 장애인들, 여성, 노인, 아동, 이주민들, 성소수자들…. 일상의 차별을 업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빈곤함부터 파고든다.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에서 바라는 보는 하늘은 과연 아름다울까. 바라볼 하늘은 있을까. 억울하게 죽어가는 순간에 바라본 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불평등이 선하지 않다. 그러나 누구나 선할 수는 없고 완벽한 평등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차별의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악행은 너무나 추하지 않은가. 생각과 행동과 제도와 실천이 아름다울 수 있고 토론과 모임과 일상은 지금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움을 논하는 자리 자체가 바로 이 나라, 이 사회가 될 수 있어야 하고 아름답지 않고 추한 것을 밀어내는 힘이 바로 시민의 권리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선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그 흔한 명언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가 각자도생의 불평등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보다 살 만하다고 역사는 말해 왔다. 



오병이어(五甁二魚)의 기적이 기적인 이유는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 생선을 기반으로 유대인 남성만 헤아린 수였던 오천 명을 먹였다는 기적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저 숫자에도 거론되지 못했을 사회적 약자들과 가난하여 도시락을 챙기지 못한 빈자들과 배고픈 사람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 기적은 아름다울 수 있었고 여전히 회자될 수 있었다. 올해도 역시 4월 첫 주일은 계명의 완성은 사랑이라 전언한, 사랑해서 죽임 당한 아름다운 청년 예수의 부활절이었다.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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