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내가 물씬 풍기는 체육관에서 무거운 역기를 들어 올릴 때는 고통이 따른다. 세상살이도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들어 올리는 것이 내려 놓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러나 들어 올리는 수고를 감수하고 나면 뭔가 얻는 것이 있다. 그래서 고통스러워도 ‘들어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들어 올리는’ 연습은 많이 한다. 반면에 ‘내려 놓는’ 연습은 좀체 하지 않는다.
역기는 그렇다 쳐도 올리고 내려 놓는 대상이 ‘감정‘ 일 때는 문제가 좀 다르다. 경험을 해보니 감정은 역기와 반대다. 오히려 내려 놓는 것이 더 어렵다. 특정 상황에 처하면 거기에 맞는 감정은 스스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올라온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벗어나도 그렇게 올라온 감정은 스스로 잘 내려가지 않고 나의 생각과 행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감정은 올리는 것보다 내려 놓는 것이 훨씬 어렵다. 왜 그럴까?
대부분의 경우, 어떤 사건을 계기로 압도하듯이 올라오는 부정적 감정들은 단순히 죄책감이나 분노처럼 알아차리기 쉬운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 보다는 이것 저것 여러 감정들이 섞인 감정복합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우선은 이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내면에서 뭔가 감정이 올라올 때, 대부분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인 것임을 말이다.
그 다음에는 감정 복합체 중에서 핵심이 되는 감정을 찾아야 한다. 가령, 내가 일을 열심히 했는데도 직장 상사가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처음에는 섭섭하다가 분노로까지 발전한다. ‘내가 이만큼 노력하고 성과를 냈으니 상사가 나를 인정해줘야 하는데, 알아 주지 않으니 나는 분노한다‘가 솔직한 감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이 되는 감정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대부분 ‘나는 분노한다‘에 주목하고 이를 내려 놓으려고 한다.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은 여전히 나쁜 것이지만, 나는 그 나쁜 것에 분노하지 않겠다’라고 생각을 고쳐 먹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대상을 놓아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에 따르면 그럴 때는 ‘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을 활용하여 감정복합체의 저변에 깔려 있는 핵심감정을 찾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일까? – 내가 성심 성의껏 노력을 했음에도 상사가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아서‘
‘무엇 때문에 상사가 나를 인정해 주어야 하는가? – 내가 다른 다른 동료들보다 더 노력했고, 그래서 더 나은 성과를 만들었기 때문에‘
정작 핵심이 되는 감정은 ‘분노한다’가 아니라 ‘네가 나를 알아줘야 한다’이다. ‘네가 나를 알아 줘야 한다. 혹은 인정해 줘야 한다.’는 것은 무슨 감정인가? 바로 자부심이다. 그렇다면 분노의 이면에는 자부심이 있는 것이다. 이 자부심을 놓아 버려야 분노도 사라지게 된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업적을 인정해주지 않는 상사에게 분노하는 것이 어찌 그런 이유뿐이겠는가. 자존심이 상해서 분노하기도 하고 또 불공정한 처사에 대한 정의로운 분노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그런 생각도 백 번 옳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을 계속 던져 보라. 가령 ‘무엇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는가?’나 ‘무엇 때문에 불공정함에 분노하는가?’ 라는 식으로 계속 파 내려가면 결국은 ‘남보다 뛰어난 능력과 성과’에 대한 자부심이라는 핵심감정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드러난 ‘분노’만을 놓아 버리면 핵심감정인 ‘자부심’은 그대로 존재하게 된다. 핵심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똑같은 감정이 꼬리를 물고 발생하게 된다.
서로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들간에 보고 싶지만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소위 밀당의 심리도 마찬가지다. ‘나보다 네가 나를 더 보고 싶어 해야 해‘가 바로 그 감정의 본질이다. 이 또한 ‘자부심’이다. 그런 자부심이 다 소진되기 전에는 보고 싶은 사람에게 먼저 연락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거나 불편하게 느껴진다.
상대방이 먼저 연락하지 않는데 내가 먼저 연락한다는 것은 내가 너를 더 보고 싶어 한다는 속마음을 들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속마음을 들킨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런 속마음을 들키는 것이 부끄러울까? – ‘내가 상대방을 더 좋아한다는 마음을 상대방이 알게 되면 상대가 그것을 활용해 나를 마음대로 지배하지나 않을까 두렵다, 소위 밀당에서 상대에게 주도권을 빼앗길까 봐 두렵다’가 보다 솔직한 심정이 아닐까? 그래서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보고 싶다고 연락하면서도 부끄럽거나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일까?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를 죽도록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이용해서 나를 지배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마음은 그것을 누구를 대상으로 품던 긍정적인 마음인데, 거기에 자부심과 두려움이 덧씌워지면 부정적 감정이 되고 만다. 핵심감정인 관계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을 놓아 버리면 먼저 연락하고 나중에 연락하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감정을 쉽게 놓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이렇듯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의 정체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이런 느낌일 것이다. ‘뭔가 내면에서 끓어 오르는 것이 있는데, 이게 뭐지?’ 사실 거기에는 온갖 부정적 감정이 섞여 있다. 그것들을 뒤져 보면 다른 것들보다 더 강렬하고 보다 근원적인 감정이 있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