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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신 Nov 08. 2021

[교학상장] 공부, 당연한 것 아닌가?

- 청소년기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중학교 3학년 도덕 시간에 청소년기에 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그 이유와 함께 순서대로 들어보라는 숙제를 냈다.


  한 장 한 장 과제물을 읽어가다가 한 학생의 글을 보고 유쾌한 미소가 지어졌다. 생각을 좀 해야 답을 할 수 있는 서술형 과제를 내주면 보통 이유 없이 단답식으로 나열하거나, 이유를 달았더라도 몇 가지를 나열하면 고작인 자못 무성의해 보이는 답지가 태반으로 돌아온다. 좀 자조적으로 말해보자면 이래야 남학생인 것이다.


  그런 중에서 녀석의 답안은 일단 A4용지를 꽉 채우고 있었다. 달필인 글씨를 마구 흘려 썼을 뿐 아니라 뒤로 갈수록 크기가 들쭉날쭉해지는 와중에도 다섯 가지를 모두 나열했다. 짐짓 교사 보란 듯이 느껴지도록 큼직큼직하게 갈겨써서 결국 A4 용지 한 장을 채우고야 만 객기도 미소를 짓게 한 요소였는데 대답은 더욱 걸작이었다.


 첫째, 공부. 당연한 것 아닌가? 어쩔 수 없다. 안 할 수 없지 않은가?


 둘째, 사교. 이것 잘못하면 인생 망한다. 왕따 당하고 싶지 않으면 해야 한다.


 셋째, 운동. 병원에 누워있고 싶나?


 넷째, 취미 생활. 노후에 텔레비전, 신문이나 뒤적거릴 셈인가? 큰 소리로 텔레비전이나 틀어놓고 리모컨이나 들고 있느니 미리 취미를 익혀두겠다.


 다섯째, 게임. 이 것 빼면 거짓말이다. 이 다섯 가지 중에 게임이 빠졌다면 내숭이다. 솔직히 안 한다고 말할 수 있는 학생이 없지 않은가?     



  참, 솔직하지 않은가? 간결하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이유를 들었고 내용도 설득력 있었다. 갈겨쓴 글씨 너머로 거침없이 자기 의견을 제시하는 패기도 느껴졌다. 학생 입장에서 별로인 마음에 안 드는 질문이지만 교사의 지시니까 깔끔하게 수행해 준다는 것처럼 보였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끝낸 녀석의 인내심도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다.


  솔직 발랄한 답지를 보며 느꼈던 기특함은 잠시, 왠지 우리네 청소년들의 현주소가 염려스럽다는 우려가 엄습했다. 가지를 치고 확산하는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숙제 검사는 계속되지 않았다.

  좋은 친구를 사귀며 우정을 쌓아야 하고 자아성장이나 가치관 정립에 애써야 한다는 대답이 영 없었던 것도 아니었건만 왠지 모를 답답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는 뭔가 녀석을 향한 변명거리라도 준비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에 사로잡혔다. 도덕책을 잘 읽었거나 그동안 내 수업 중의 훈화를 잘 듣고 써 내려간 모범적인 답지보다 훨씬 더 뒤통수가 따끈 거리게 끌어당기는 무엇, 그 무엇은 도대체 뭐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전체적으로 답지를 읽어가면서도 시작된 걱정은 멈출 수 없었다. 그저 밝고 투명하게 패기 있는 이상에 취해있어도 좋을 나이의 소년들이 지나치게 현실적이 돼 버렸다는 생각과 함께 녀석의 답지를 여러 번 다시 열어봐야 했다.


  공부를 첫째로 내세운 이유는 가진 것이 없다면 실력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고, 사교를 강조한 것은 두루두루 인간관계를 잘할 줄 알아야 이른바 성공에 도달할 수 있으리란 어른 뺨치게 영악한 판단력을 이미 갖추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섣부른 처세술에 눈 떠버린 것은 아닐까?내 마음에 들어서, 뭔지 모를 매력이 있어서, 나를 감동시켜서 그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소망. 그리고 그와 진정한 우정을 가꾸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이해타산을 앞세우는 계산에 벌써 눈떴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은 지나친 억측일까? 그뿐이 아니다. 젊은 시절을 산업의 현장에서 경제를 건설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애썼을 조부모 뻘의 어르신들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이나 보며 소일하는 무능력자로 바라보는 시선은 혹시 우리 어른들의 태도를 무비판적으로 대물림한 것은 아닐까?


  자신에게 솔직하고 어르신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을 만큼 조숙하면서도 정작 저 자신은 게임의 나락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자백하는 청소년들, 그들은 왜, 벌써, 무엇에 실망한 것일까?


 가까운 주변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학생이 있다면 그의 손을 가만히 맞잡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꼭 느끼게 해 주어야겠다는 소명의식을 다잡는 것으로 나도 서둘러 바쁜 일과를 이어갔다. 시급한 일이지만 시간을 두고 인연을 따라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그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일이라는 점은 부디 한 시도 잊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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