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한글을 모르는 우리 집 4세. 그래서 다행히 텔레비전 리모컨 통솔권은 내가 쥐고 있다. 즉, 나의 검열을 피하지 못한 만화는 시청할 수 없다.
내가 특히 지양하는 프로그램은 이런 것이다. 단순 반복 몸개그에 알 수 없는 의성어, 의태어를 남발하는 1차원적 애니메이션. 이런 류가 편성표에 떠 있으면 나 혼자 제목을 읽고 그 채널은 슬쩍 피해 간다. 한두 번 보여줬더니 이상한 소리와 몸동작들을 아이가 바로 따라 하길래 나는 엄마로서 바로 검열권을 남용했다.
슈팅스타 캐치 티니핑도 마찬가지다. 포켓몬스터의 여자아이 버전이랄까? 싸워서 티니핑들을 캐치하면 평화가 찾아오고 끝이다. 지난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즈음, 시즌 종영 직전 에피소드들이 무한 반복됐다. 아이는 이미 티니핑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슈팅스타를 보여달라고 요구를 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애니메이션 역시 영양가가 없다는 판단 하에, 방영 중이어도 온갖 변명을 대며 스리슬쩍 다른 채널로 유도했다.
"오늘은 아무 데서도 티니핑을 안 하네."
"아쉽게도 낮에 티니핑이 다 끝났나 봐."
"이상하다? 요즘 티니핑이 왜 안 하지?"
그러다 슈팅스타 캐치 티니핑이 편성표에서 사라진 시기가 있었으니! 그래도 나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시즌이 종영하고 머지않아 새 시즌이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인지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 채 곧이겠거니 짐작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지난달 중순에 새 시즌이 시작되었다. 이름하여 <프린세스 캐치 티니핑>이다. 나는 편성표에서 이 제목을 보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이가 새 에피소드들을 보면 잔뜩 빠져들 게 분명하고, 그 피규어들을 새로 사달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집엔 기존 '핑' 피규어들이 50마리도 넘게 있는데 말이다. 새 시즌만큼은 막아야만 했다. 약 한 달간. 나는 리모컨을 사수하고 '프린세스'가 들어간 제목은 열심히 골라냈다. 그래서 아이는 새 시즌이 시작된 걸 몰랐다.
다행히 다른 채널 대체작들로 위기를 잘 넘기고 있었다. 그래서 긴장을 늦추고 있었나 보다. 지난 주말 저녁, 나의 엉덩이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부지불식간에 소파에 있던 리모컨을 엉덩이로 눌렀고, 그 순간 프린세스 티니핑 채널이 나와버렸다.
당황한 나. 애써 태연한 척 잽싸게 뽀로로 채널로 돌렸다. 하지만 티니핑 마니아인 우리 딸은 잠깐 본 장면에 어느새 매료되어 그 채널을 요구했다.
망했다.
하는 수 없이 프린세스핑들을 오픈했다. 더 이상 시류를 막을 수 없었기에 결단을 내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는 그것이 앞으로 쭉 하는 시즌이라는 것은 모르고, 새로운 캐릭터들이 잠깐 나왔다는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중이다.
티니핑 제작사는 참 영악하다. 딱 크리스마스 직전에 새 시즌을 내놓아 아이들이 선물로 사달라고 하기에 적합하게 설계를 했다. 그것도 기존 티니핑들과 완전히 다른 캐릭터들이어서 새로 살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원래도 그런 마케팅인 건 알고 있었지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런 일이 벌어지니 그 사악함에 고개를 절레절레하게 된다.
지금 아이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프린세스 티니핑 캠핑카를 받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나와 남편은 사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아이는 너무 간절하다.
이 티니핑 사태에 칼을 빼 든 사람은 의외로 애 아빠다. 티니핑 피규어는 단순한 인형 격이라서 생각을 닫는 '닫힌' 장난감이라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절대 새로운 시즌의 것은 사주지 않겠다는 철칙을 세웠다. 딸바보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나도 놀라는 중이다. 그런데 아빠의 이 단호함을 아이는 당연히 모른다. 그리고 산타할아버지가 캠핑카를 사줬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런 내 딸이 가여워진 딸의 삼촌. 즉, 내 동생은 조카에게 티니핑 캠핑카를 사주고 싶은 모양이다. 정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다마는... 새 시즌에 빠져드는 꼴은 정말 두고 볼 수 없다. 어떻게든 막아야만 한다. 지금 그것이 내 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