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 믿는다
나는 회사로, 연우는 어린이집으로. 우리가 집을 비운 동안 남편은 출근 전까지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린다. 내가 출근을 시작한 후로 매일 아침 남편이 묵묵히 반복해 온 일이다.
‘집안일은 아무리 해도 티가 안 나.’
오매불망 아내의 칭찬을 기다리던 남편이 말없이 넘기던 마음을 툭 던진다. 매일 해야 하는 집안일이 칭찬받을 일인가 인색해지다가도, 밤늦게 퇴근하는 남편이 아침잠을 줄여가며 설거지하는 뒷모습이 떠올라 마음 한켠이 짠하다. 뒤돌아서면 다시 쌓여 있는 집안일의 기이한 현상을 남편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엄마의 말처럼 집안일이란 열심히 해도 티가 나지 않고, 더러워야만 눈에 보이는 억울한 노동이다. 그나마 평일엔 낫다. 연우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간식 먹고, 씻고, 금세 잠드니까. 그 틈에 나는 어린이집 가방에서 나온 물통, 저녁 도시락, 간식통을 설거지한다. 그중 뚜껑과 빨대를 따로 씻어야 하는 게 제일 귀찮다. 다음엔 건조된 빨래를 개고, 바닥을 닦는다. 집안일을 겨우 마무리하고 거실을 둘러본다. 깨끗해진 우리 집은 볼 때마다 낯설다. 연우가 깨어있으면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다. 내일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장난감이 각자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뒤덮겠지.
토요일은 억울한 노동이 정점을 찍는 날이다. 남편은 일하러 나가고, 집 안엔 어지럽히는 연우만 남는다. 집안일과 육아를 동시에 해야 한다. 그동안 일하기 전의 나는 어떻게 해냈는지 새삼스럽기만 하다. 책장에 꽂힌 책들은 모조리 뽑힌 지 오래다. 쌓아둔 종이 벽돌은 완성되기도 전에 쓰러졌다. 서랍에 얌전히 머무르던 구슬은 한꺼번에 쏟아져 사방으로 흩어진다. 한 명은 정리하고, 한 명은 어지르는데 늘 연우가 이기는 싸움이다. 포기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다.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서 올려야 한다. 산이 뾰족한 탓에 바위는 그때마다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진다. 다시 골짜기로 내려가 바위를 굴려 올리는 일을 반복한다. 그것도 평생. 인간에게서 죽음을 없애려 한 죄로 신들에게 형벌을 받은 시지프 이야기다. 시지프가 굴리는 바위처럼 집안일도 반복되는 노동의 연속이다. 주말이 되면 내가 굴리는 바위는 더욱 커진다. 금방이라도 그 밑에 눌려 납작해질 것만 같다.
난장판이 된 거실에서 연우와 꽁냥꽁냥 놀아주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무릎에 앉혀 책을 읽어주다가도, 식탁 위로 자꾸만 눈길이 간다. 지금 당장 설거지통에 넣지 않으면 간식 그릇에 붙은 음식물이 금방 말라붙겠지. 눈은 주방에, 몸은 거실에, 마음은 중간 어딘가에 걸쳐 있다. 결국 연우가 낮잠 자기만을 기다리는 나를 발견한다. 매일 밤 ‘주말에는 실컷 놀아줘야지’ 다짐하지만, 집안일 앞에서 그 다짐은 늘 맥없이 무너진다.
트롤리에 가지런히 정리해 둔 기저귀는 어느새 안방 바닥에 나뒹군다. 밟고 미끄러지지 않게 얼른 치워야 하는데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다. 이거 꺼내달라, 저거 누르게 해 달라며 말 대신 손짓하는 연우를 안고 집안을 빙빙 돌아다닌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안 아픈 데가 없다. 이쯤 하면 나는 엄마가 아니라 기동력 좋은 가마가 된 기분이다.
꽤 오래 놀아준 것 같아 삼십 분은 지났겠지 하고 시계를 보면 고작 오 분. 느리게 가는 시간이 실망스럽기까지 해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눈을 감는다. 발끝에 닿는 이상한 느낌에 다시 눈을 떠보니, 연우가 아기 손톱깎이를 내 발에 갖다 댄 채 웃고 있다. 발톱을 잘라주려는 그 모습이 어이없고 귀여워 웃음이 터진다. 연우가 깊은 잠에 들 때마다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발톱을 깎아준 기억뿐인데, 이 작은 아이는 도대체 물건의 용도를 어떻게 알았을까. 혹시 내가 천재를 낳은 건 아닐까.
숨겨둔 간식도 이제는 곧잘 찾는 연우가 배도라지 주스를 들고 왔다. 뚜껑을 열어달라며 주스를 내밀더니, 자기 옷자락을 펼쳐 보인다. 손아귀 힘이 약해 뚜껑을 열 때마다 옷자락으로 감싸 쥐고 열어준 걸 기억한 모양이다. 쪼끄만 게 어찌나 잘 보고 기억하는지. 기특해서 또 웃음이 난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던 몸을 일으키게 하는 건 연우의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다. 육아와 가사노동의 사이에서 균형을 잃을 때마다 좌절감이 밀려온다. 가파른 경사에서 무서운 속도로 굴러오는 바위에 깔릴 것만 같아 숨이 턱턱 막힌다. 그럴 때마다 연우는 꼭 무언가를 아는 아이처럼 사랑스러운 손짓으로 나를 이끈다.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고. 바위를 굴리는 헛된 노동은 이를 받아들이고 계속 밀고 가는 시지프의 태도를 통해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어차피 기억도 못할 텐데...’ 하는 냉소가 슬며시 고개를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내가 있다는 믿음으로, 나는 다시 아이를 본다.
곧 무너질걸 알면서도 함께 블록을 쌓고, 또 찢어질걸 알면서도 책장을 붙잡고 테이프를 바른다. 바위는 매번 다시 굴러 떨어지지만, 나는 또다시 기꺼운 마음으로 허리를 숙인다. 연우는 내가 굴리는 바위이자, 그 바위를 다시 밀게 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