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의 통통한 다리를 볼 때마다 땅 위에 곧게 서있는 작은 나무를 떠올린다. 손자의 토실토실한 두 다리가 마치 어린 나무처럼 보기 좋다는 박완서 작가의 산문을 읽은 후부터다.
작가란 어떤 사람들일까. 작가의 문장은 언제나 일상에 특별함을 부여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을 빌려 나의 세계를 다시 들여다보면, 그저 귀엽기만 했던 아이의 다리도 땅의 정기를 빨아올리는 실한 다리가 되는 것이다.
사방팔방 뛰어다니기 좋아하는 연우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다가도, 퇴근 후 연우를 만나면 다시 아기가 작게만 느껴진다. 작은 방에서 큰 방으로 이동할 때 사람이 갑자기 작아 보이는 착시현상처럼 회사에서 하루 종일 어른들 사이에서 일하다가 연우를 마주하면 또다시 아주 작은 아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내 허벅지 중간에 머리가 겨우 닿는 연우가 내 다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아이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떤 모습일까.
아이가 보내는 하루는 어떤 모습일까.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의 색이 바뀌길 기다리다가, 연우의 눈높이에 맞춰 앉은 적이 있다. 땅과 가까이 붙은 느낌이 어딘가 낯설고 답답했다. 그때 차도 위로 지나는 자동차가 훨씬 가까운 곳에서 위협적인 모습으로 지나갔다. 소리도 더 크게 들렸다. 헤드라이트에 불이라도 켜지면 그 자체로 무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우가 밖에서는 몇 걸음 걷다 말고 자꾸 안기려는 이유를 알았다. 무서운 것들로부터 멀어질 수 있고, 엄마의 목소리와 더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우의 눈에 궁금한 것들은 모두 아이의 머리 한참 위에 있었다. 엄마는 자신의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설거지를 하고, 화장을 하고, 밥을 먹었다. 그러고 보니 발끝이 노래지도록 까치발을 들고 소파 위로, 침대 위로, 의자 위로 오르기 위해 바둥대는 연우가 이해되었다. 엄마의 세계가 궁금한 연우의 몸부림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연우는 벌써 걷고 뛰는데 나는 아직 연우를 누워서 모빌만 바라보던 아기쯤으로 여긴 것 같아 미안하다. 아기의 시간은 얼마나 빠른지, 매일 자고 일어나면 조금씩 변하는 얼굴을 보면서도 자주 잊곤 했다.
연우의 하루는 나의 하루와 다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아기에게 하루는 그야말로 농축된 시간이다. 우리가 자는 동안 회복하듯, 아기는 자는 동안 자란다. 잠에서 깨어나면 하루가 지났다고 느끼지 않을까. 그런 셈이라면, 나의 하루는 연우에겐 이틀쯤 될 것이다. 하루에 세 번씩 낮잠을 자고 밤잠까지 자던 시절엔, 나의 하루가 연우에겐 나흘이었을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이면 오늘의 연우는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아기를 안고 잠들면서도 마음 한켠이 아쉽다.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놓친 아이의 모습은 얼마나 많을까. 애틋한 눈길로 아이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제보다 어금니는 더 올라왔을 테고, 손톱도 더 자랐겠지. 할랑하게 종아리를 덮던 바지가 지금은 허벅지 중간에 말려 올라가 있다. 젖꼭지까지 올려 입던 배바지는 어느새 연우 배꼽 아래까지 내려가 고무줄 자국을 남겼다.
연우의 시간을 붙잡으려 이토록 기록에 매달리는 중이다. 겨우 몇 장의 사진, 몇 줄의 문장으로 연우의 하루 중 얼마를 담을 수 있을까. 그 사이 아기는 어느새 자라서 엄마에게 빨리 따라오라며 손짓을 하겠지.
요즘 연우는 점프를 하려고 무릎을 굽혔다가 발바닥을 달싹이며 들뜬 표정을 짓는다. 아직은 두발이 동시에 뜨지 않지만 몇 밤만 더 지나면 어느 날 갑자기 가뿐하게 몸을 띄울 것만 같다. 그때마다 내가 환하게 웃으며 손뼉 칠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천천히 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