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심지어 4월이다. 3월만 해도 특유의 흐린 하늘과 아직 겨울 냄새가 배인 바람 때문에 꽃은 언제 피려나 했다. 어어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벚꽃은 피었고 바닥에 나뒹구는 꽃잎이 더 많다. 회사에 있는 동안 감질나는 산책을 하며 주말만 기다린다. 설레는 마음으로 주말을 맞이하면 기쁘면서도 아쉽다. 올해 보는 마지막 벚꽃이겠구나. 눈으로 보면서도 더 어쩌지를 못해 비슷한 사진만 연신 찍는다.
매번 아쉬운 마음으로 대하는 건 봄꽃만이 아니다. 결혼 전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대신 죽을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할 만큼 사랑하는 첫 조카가 벌써 여섯 살이다. 그 밑으로 세 살 터울의 내 아들과 한 살 더 어린 둘째 조카가 쪼르륵 생겼다. 꽃 같은 아이들이 크는 걸 보면 신기하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요리조리 관찰하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쩜 이리 다른지 세상에 모든 존재는 유일하고 고유한 존재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는다.
여섯 살 조카는 태어날 때부터 눈동자가 또렷했다. 책을 보여주면 내용을 이해하기라도 한 듯 책 속의 그림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엄마 다음으로 아빠가 아닌 ‘빠방이’를 외치던 조카는 자동차를 무척 좋아해서 두 돌도 전에 ‘표지판 안 보고 지나가면 다른 차랑 쾅 부딪혀’하며 책 속 문장을 외웠다. 카페에 가서도 어른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느라 얌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엄마가 하지 말라는 건 손도 대지 않는 조심성이 많은 아이다.
반면 우리 아들 연우는 조카의 정반대다. 접힌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게 물려받은 책들을 다 물어뜯고 찢는 바람에 둘째 조카에겐 물려주지도 못하고 새로 사줬다. ‘빠방이’ 같은 애착 물건 하나 없이 어느 것이든 손에 쥐여주면 호불호 없이 다 좋아해서 일단 흔들고 던지고 본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차 이름을 줄줄 외우던 조카와 달리 연우는 아직도 바퀴가 달린 건 전부 다 ‘차’ 하나로 부른다.
블록이 큰 순서대로 정렬할 줄 모르고, 책 한 권을 끝까지 보지 못하는 아이 모습을 보며 괜스레 조급해진 적도 있다. 내가 잘 아는 아기라고는 발달이 빨랐던 첫째 조카뿐이어서 연우의 말과 행동이 늦으면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한동안 습관처럼 조카의 옛날 모습을 뒤적거리던 나의 행동을 멈추게 한 것은 우연히 읽은 책의 한 문장이었다.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가 책일 필요는 없다.”
어쩌면 연우는 조카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경험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책 속 문장을 마음속에 품고 연우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연우는 어른들의 말보다 행동을 관찰하고 모방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다. 엄마가 자신을 돌보듯, 연우도 엄마 보살펴주기를 좋아한다. 밥을 한 입 먹여주면 다음엔 자신이 엄마 입에 넣어주고 싶어 한다. 같은 침대에 누워 엄마 어깨를 토닥이며 자장가도 흥얼거린다. 귀여워서 쳐다보니 인자한 눈빛을 하고선 손가락으로 엄마 눈썹을 쓸어 준다. 어서 눈 감고 자라는 뜻이다. 언젠가 김치 냉장고를 혼자 열 줄 아는 연우가 손으로 서랍을 열고, 짧은 다리를 겨우 올려 문을 닫을 땐 소름이 돋았다.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연우를 통해 보게 된 것이다.
지난 주말, 이미 떨어진 꽃이 아쉬워서 만개한 벚꽃을 보러 경주에 다녀왔다. 그리고 한 번 더 깨달았다. 같은 꽃이라도 어디서 자라는지에 따라 피는 시기도 다르다. 아이도 똑같다. 다만, 각자의 계절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