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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 소나무 Dec 11. 2023

나의 기쁨, 유에유에(悦悦)

(8화) 발가락 사이 모래알

그녀의 이름은 '기쁨을 주는'이라는 뜻의 유에유에(悦悦)이다. 영어로는 'Joy'. 실제로도 그녀는 그랬다. 비글미 넘치는 성격에 숨겨진 센티함.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녀의 배려, 수줍음 속에 있는 따뜻함. 그녀는 내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만난 첫 번째 아시안이었다. 


아시안이 많지 않은 동네였기에 생김새가 닮은, 나와 같은 인종의 사람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내적 친밀감이 상당했다. 잔뜩 긴장했던 나의 ESL 수업 첫날, 그녀는 따뜻한 눈빛으로 나의 뻣뻣해진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다. 비슷한 문화권인 덕에 우리는 금방 공통점을 찾아냈다. 내가 유일하게 가본 중국의 도시는 상하이였는데 마침 그녀는 상하이 출신이었다. 그녀 역시 한국문화를 좋아했고 서울도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었기에 우리의 대화는 막힘이 없었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지만 문화권이 같기에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하다가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막히게 되더라도 서로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었다. 

상하이. 출처: Pixabay

유에유에는 한국 드라마와 예능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았는데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는 무려 '응답하라 1988'이었다. 한국의 80년대 모습을 그려낸 드라마를 공감하는 그녀가 신기했다. 그녀 말로는 자신의 어릴 적 중국의 모습과도 비슷해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일으킨다고 했다. 유에유에는 당시 한국에서 한창 유행이던 예능 '환승연애'와 '쇼미 더머니'까지 모두 섭렵해 보았는데 이 프로그램에 관한 대화를 하다 보면 이 친구가 중국인인가 한국인인가 헷갈릴 정도였다. 그 정도로 유에유에는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깊었고 중국 문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내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낯선 듯 익숙한 중국의 문화  


미국에 온 후 처음 맞이하는 설날, 유에유에는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한국의 설날처럼 중국도 음력 1월 1일을 춘절이라고 부르며 기념하는데 함께 명절을 보내자고 초대한 것이었다. 도착한 유에유에 네 집엔 다른 중국 친구들과 대만친구들이 있었다. 다 함께 새해 명절을 즐기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우리는 유에유에가 준비해 둔 재료로 만두와 비슷한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중국식 만두인 ‘쟈오쯔(饺子)’였는데 속재료는 조금 달랐지만 우리가 설날에 빚는 만두와 비슷했다. 익숙하면서도 조금은 낯선 맛이었지만 덕분에 미국에서 처음 맞이한 설날을 나름 설날답게 보낼 수 있었다. 

설날에 먹는 우리나라 만두와 비슷한 중국의 쨔오쯔. 출처: SOL

이날 모인 사람 중에 나와 남편만이 유일한 한국인이었기에 그들이 중국어로 대화할 땐 대화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래도 대략적인 분위기를 통해 그들의 대화가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유추가 가능했는데 그들의 대화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바로 '어느 지역 출신'인가 하는 것이었다. 


유에유에는 상하이 출신이었는데, 그녀가 상하이에서 왔다고 할 때마다 다른 중국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처음엔 그들의 반응이 조금은 의아했지만 한국인들끼리도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청담동, 한남동 같이 흔히 우리가 부촌이라고 불리는 곳 출신이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우와'하는 반응이 나오는 것과 비슷한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나중에 나는 유에유에를 통해 중국의 '후커우(戶口) 제도'에 대해 알게 됐다. 중국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후커우를 물려받게 되는데, 후커우 제도는 자신이 태어난 지역의 후커우를 부여받으면 타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길 수 없도록 한 정책이라고 한다. 당연하게도 상하이나 베이징 같은 도시일수록 교육, 의료 분야의 혜택이 높기 때문에 이 지역의 후커우를 소지한 것은 굉장한 특권이라고 한다. 


친구는 운이 좋게도 상하이의 후커우를 가진 부모님 덕분에 상하이 출신이 될 수 있었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면 농촌 지역 후커우를 가진 친구들은 도시의 후커우를 얻기 위해 유학을 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해외에서 공부한 인재가 되어 귀국하게 되면 정착할 도시를 정할 수 있고 도시의 후커우를 가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평소 중국의 문화에 관심이 별로 없었고, 중국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던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나라 바로 옆의 나라에 대해 이 정도로 내가 무지했구나 반성하게 됐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유에유에를 만났을 때는 한국에서 한창 MBTI가 유행하던 때였는데 중국 역시 그랬나 보다. 우리는 MBTI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성격유형이 무엇인지 알게 됐는데 그녀는 내가 만났던 나와 같은 MBTI를 가진 첫 번째 친구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녀에게 더욱 동질감을 느끼게 됐다. MBTI를 맹신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우리가 같은 결인지 파악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니까 말이다. 


유에유에는 나보다 훨씬 더 섬세한 친구였다. 그녀는 나란 사람을 단숨에 파악했고 나의 세심한 감정까지 어루만져 주었다. 그녀는 나보다 미국생활에 대한 경험이 2년 정도 더 많았고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어떤지 아마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그녀 역시 느껴보았을 감정일 테니 말이다. 


그녀는 항상 내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나의 표정과 분위기만 보아도 내 감정을 캐치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한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나와 오랜 친구들만이 알아챌 수 있는 나의 숨겨진 부분까지도 알아봐 주었다. 나는 종종 한없이 깊은 절망감이나 우울감을 느낄 때면 자기혐오에 빠져들 때가 있는데 유에유에는 기꺼이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내가 가진 장점들을 끄집어내 주며 나를 격려했다.  


유에유에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도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나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용기를 내 누군가에게 보여줬을 때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반응은 아마 상대방이 나를 공감해 주는 일일 것이다. 그녀는 그런 친구였다. 내가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생각이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고 해도 나를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는 사이였다. 


낯선 나라, 낯선 도시, 낯선 사람만이 가득한 곳에서 나는 유에유에란 진정한 친구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위안이 됐다. 그녀는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계속해서 나에게 조건 없는 순수한 우정을 퍼주었다. 유에유에란 존재만으로도 나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살면서 공허함을 느끼지 않았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 보여주는 한결같음과 이 관계의 안정함은 나를 안심시켰고 안도하게 했다. 

유에유에네 집. 그녀의 감성이 가득한 따뜻했던 집. 출처: SOL


카운트다운 


적어도 4년 이상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머무를 예정이었지만, 남편이 학교를 옮기게 되면서 텍사스로의 이사가 결정됐다. 우리에게 변수가 없었다면 사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떠나게 되는 건 우리가 아닌 유에유에 네가 먼저였을 것이다. 유에유에 남편의 박사과정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기에 그녀의 남편이 직장을 찾으면 타주로의 이사가 사실상 확정이었다. 이에 나는 항상 그녀에게 애틋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 없이 이 도시에 남겨질 것을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나의 가장 믿을만한 주춧돌 하나가 뽑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가했다. 그 도시를 먼저 떠나게 된 건 나였고 남겨질 사람은 유에유에가 되었다. 유에유에는 떠나기 전까지 더 많은 추억을 만들자고 했다. 우리는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고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행복한 순간들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리버사이드 공원에서의 피크닉. 출처: SOL

날씨가 좋은 날엔 매트를 들고나가 피크닉을 즐겼다.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들은 어느새 우리의 아지트가 됐고 함께 공부하고 책을 잃고 수다를 떨며 소소한 시간들을 함께했다. 이때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는 피스와이스(piecewise), 인다(Indah), 블룸(blum) 커피였는데 우리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카페를 골랐었다. 사실 이 조그만 도시에 그나마 감성카페라고 할 수 있을만한 곳이 별로 없었기에 어쩌면 이곳들이 우리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피스와이스는 우리가 처음 같이 시간을 보냈던 추억이 담긴 곳이었고 인다는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가 있는 곳이었다. 블룸은 서울이나 상하이에 있을 법한 인테리어의 카페로 우리에게 익숙함을 주었다. 특별할 것 없는 날들이었지만 헤어지는 날까지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내가 떠나는 날까지 카운트타운을 시작했다. 


생채기처럼 남은 그날의 기억 


떠나는 날까지 멀어지기보단 가까워지길 택한 탓일까. 우리가 보았던 마지막 날에 우린 서로 많은 눈물을 쏟았다. 친구들이 열어준 나의 작별파티(farewell party)에서 돌아오는 길이였다. 나의 우버기사를 자처해 술을 마신 나를 집까지 바래다줬던 그 밤, 우리는 그녀의 차 안에서 진짜 작별인사를 했다. 이게 영원한 이별이 아니란 건 알지만 다시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기에, 내가 이곳을 떠나면 다시는 지금처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었기에, 전과 모든 것이 같을 수는 없었기에 슬픈 감정이 고조됐다. 유에유에는 내게 말했다. "너와 하는 이 이별은 내가 전 남자친구와 헤어질 때와 비슷한 느낌이야"라고 말이다. 


그랬다. 우리가 느끼는 이 작별의 감정은 정말 전 남자친구와 헤어질 때처럼 강렬했고 아팠다. 아마도 다시 보게 될 날이 언제일지 기약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만난다고 해도 지금처럼 매일 보고, 매일 모든 생활과 자잘한 고민을 나누던 때와는 다를 테니 말이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그녀를 보며 나는 최대한 웃으며 헤어지고 싶었다. 울음을 참고 최대한 웃으며 그녀를 배웅했다. 멀어지는 그녀의 차를 보자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엉엉 울며 집에 들어간 나를 본 남편은 깜짝 놀라 나를 달래주었다. 그랬다. 그녀의 말처럼 이 감정은 커다란 상처로 남았다. 그땐 몰랐지만 이 강렬했던 감정은 생채기처럼 아직도 내게 남아있다. 



이 모든 감정들은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경험한 적 없는 것들이었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올 때도 이렇게 강한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한국에 가면 언제든 볼 수 있는 사람들이고 진짜 이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만났던 친구들은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한국에 있는 나의 오래된 친구들과 맞먹을 정도의 신뢰감과 유대감이 있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도 괜찮은 사이였기에 그들 옆에서 나는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었다. 사회적 가면도 필요 없었고 온전한 '나'가 됐던 것 같다.

그랬던 친구들과의 예상치 못했던 이별은 내게 가장 아픈 이별이 됐다. 헤어지는 중에도 나는 많은 감정을 쏟아냈고 그땐 그저 그 감정에 압도돼 몰랐었다. 이 이별은 내게 깊은 상처가 됐다는 것을. 


텍사스로 이사와 5개월 동안 지내며 새로운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이곳에서 나는 여전히 공허함을 느낀다. 유에유에와 나눴던 우정이 특별했던 만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인연에 대한 기대도 컸다. 하지만 아직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경험했던 행복하고 슬펐던 감정들에 매몰돼 있는 걸까. 새로운 정착지에서 기대와 실망만이 반복뿐인 날들이다.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았던 예상치 못했던 특별한 인연은 내 인생의 타임라인에 확실히 큰 획을 그어놓았다. 절대 잊지 못할 친구를 만났고, 이에 감사한다. 하지만 한동안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야 하는 나의 상황에서 이제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이 겁이 나기도 한다. 그만큼 그들과 함께한 시간은 미국에서 보낸 가장 행복한 기억 중에 하나였고 동시에 가장 아팠던 감정이기도 하니까. 다시 누군가에게 이만큼 마음을 열고 진실되게 다가갈 수 있을까.

행복했던 우리들의 시간들. 출처: 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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