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발가락 사이 모래알
카밀라를 처음 만났던 때는 평범한 일상들이 조용히 흘러가던 어느 봄날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ESL 수업을 듣던 중이었다. 문을 열고 또래로 보이는 한 여자애가 들어왔다.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망울과 오뚝한 코, 헤어밴드로 깔끔하게 올린 머리까지 그녀의 첫인상은 우아함이었다. 콜롬비아(Colombia)에서 온 카밀라는 미녀의 나라 출신답게 특유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와 볼륨감 있는 몸매 그리고 미스 유니버스 같은 눈부신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성격 또한 쾌활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친구였다.
ESL은 다양한 연령대의 이민자들이 찾는 수업인 만큼, 생각보다 또래를 마주치는 것이 흔치 않았었다. 그 와중에 카밀라의 등장은 가뭄 속 단비 같았다. 나는 카밀라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녀와 사적인 약속을 잡게 되었다.
웃픈 만남
첫 만남의 날, 나와 유에유에(참고: 나의 기쁨, 유에유에(悦悦))는 우리가 처음 만났었던 카페에서 카밀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또래를 만난다는 생각에 우리는 다소 들떠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내 언어의 장벽에 가로막히게 되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을 카밀라에게 질문했고 그녀는 짤막하게 답을 해주었는데 그녀의 표정이 어딘가 밝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 유에유에 와 나는 그녀가 우리와 친구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가 보다 오해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카밀라는 그날 우리의 영어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첫 만남 때 일어났던 이 해프닝은 우리의 웃픈 에피소드 중 하나로 남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유에유에와 나는 문화권이 비슷한 까닭에 서로의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문맥과 상황상 유추해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나라 모두 한자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도 약간의 이점이 존재했다. 하지만 카밀라와는 비슷한 문화권도 아니었고, 공통점이라곤 비슷한 또래라는 것, 그리고 현재 처해있는 상황이 비슷하다는 점뿐이었다. 카밀라 역시 우리처럼 남편의 학위를 위해 미국에 왔고 현재의 신분으로 미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 공통점은 우리를 가까운 친구로 만들기에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우리의 첫 만남에서는 이 공통분모 만으로는 서로 가까워질 수 없을 듯 보였다.
사실, 문화권이 다르다는 것 보다도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더욱 장애물이 되었던 건 영어를 쓸 때 가지고 있던 각자의 악센트였다. 미국에 와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며 깨달은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의 영어 악센트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다소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물론 그때는 우리 모두 영어 스피킹 실력이 지금에 비하면 많이 떨어졌기에 서로의 영어를 이해하는 게 어려웠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점은 익숙하지 않은 영어 악센트가 대화하는 데 있어 분명한 걸림돌이 됐다는 부분이었다.
2년 반 동안 미국에 영어를 하며 발견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내가 그 사람의 영어를 잘 이해하면 그 사람도 나의 영어를 잘 이해한다는 점이다.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의 영어를 잘 알아듣는 사람들은 나 역시 상대방의 영어를 이해하는데 수월했다. 성인이 되어 미국에 와서 영어를 쓰면서 이미 고착화되어 있는 악센트를 고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나의 ESL 선생님은 "네가 가지고 있는 악센트는 네가 어디에서 온 지 알려주는 것이니, 고치려고만 하지 말고 너의 악센트를 자랑스럽게 여겨라"라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점점 이 말에 수긍하게 된다.
카밀라와의 첫 번째 커피타임은 이렇게 아쉽게 끝이 났지만 이 만남은 우리의 시작이었다.
두 번째 기회
첫 만남 이후 몇 달이 지났다. 그 사이 카밀라와 우린 그저 학교에서 만나면 인사하고 안부정도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우리는 다시 한번 커피타임을 가질 수 있는 날이 생겼다. 다시 만났을 때 카밀라는 우리에게 조금 더 자신을 오픈하는 듯 보였다. 그 사이에 영어에 대한 자신감도 되찾았는지 우리의 대화는 첫 만남 때보다 더 매끄러웠다.
카밀라는 진취적인 성격이었다. 자기 계발에 열심이었고, 미래의 목표를 위해 현재를 살아내고 있었다.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카밀라는 커피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커피의 산지로 유명한 콜롬비아에서 원두를 가져와 미국에서 판매하는 사업을 구상 중이었다. 마침 그녀의 가족이 커피 농장을 운영하고 있어 다양한 원두를 얻기 용이했다. 카밀라는 콜롬비아에서 공수해 온 원두를 우리가 맛보고 평가해 주길 부탁했는데 이날 맛본 콜롬비아 커피는 정말 예술이었다. 원래 산미가 있는 커피를 좋아했던 내게 콜롬비아 원두는 완벽하게 입맛에 맞았다. 이날 커피를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나중엔 속이 쓰릴 정도였다.
이러한 소소한 만남들은 점점 더 우리를 가깝게 해 줬다. 카밀라의 첫인상을 우아한 공주님으로 보았지만 그녀를 알면 알수록 그녀는 공주님보다는 알파걸에 가까웠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루는 다운타운에 새로 생긴 카페에 갔다. 이 카페는 유명한 커피 산지에서 원두를 가져와 직접 로스팅해서 원두를 판매하며 직접 고른 원두로 커피를 내려주는 곳이었는데, 카밀라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주인과 스몰토크를 시작해 커피사업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당차면서도 친근하고, 언제나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잘 이용하는 카밀라에게 빠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슷한 신분으로 미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제약적이었던 우리는 만날 때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함께했다. 커피 사업은 향후 그녀가 도전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현재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곤 시장 조사를 하고 구체적인 사업내용을 구상하며 미래에 그녀의 시간이 도래하길 기다리는 수 밖엔 없었다.
조금 더 현실적인 진로계획으로는 대학원을 진학하는 옵션이 있었다. 그녀는 콜롬비아에서 산업공학(industrial engineering)을 전공하고 관련 분야에서 엔지니어로 일한 경험이 있는 말 그대로 공대 여신 있었다. 문제는 남편의 직장 때문에 이 도시에 머물러야 했고 당시 우리가 살던 컬럼비아란 도시에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South Carolina)가 유일한 기회였다. 하지만 카밀라가 원하는 세부 전공과 일치하는 교수님이 그 학교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남은 옵션은 전공을 바꾸던가, 아니면 인내의 시간을 거쳐 미래에 기회가 오길 기다리는 수 밖엔 없었다.
나 역시 이러한 고민을 안 했던 건 아니기에 비슷한 고민을 나누면서 우리는 점점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갔다. 같은 처지만큼 서로의 고민과 감정을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이가 있을까 싶다. 그렇게 우린 진정한 친구가 되어갔다.
나의 치어리더
그녀는 삶에 대한 가치관과 태도 역시 나와 닮은 점이 많았다. 그녀 역시 도시가 아닌 작은 소도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개천에서 용이 되는 것을 꿈꾸던 친구였다. 미래에 대한 목표를 위해 현재를 인내할 수 있었고 가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친구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삶, 내가 이룰 삶에 대한 기대감과 확신을 지닌 멋진 친구이다.
카밀라는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친구였다.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시련이 있어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멘탈을 가진 친구였다. 긍정적이었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어디서나 늘 당당한 친구였다. 의리도 있는 친구여서 주변 친구들의 고민에 진심으로 걱정하고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따뜻한 친구이다. 나는 한번 슬럼프에 빠지면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진다. 그럴 때마다 카밀라는 나에게서 긍정적인 면을 끌어내주고 넌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숨어있던 나의 자신감을 끌어와주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카밀라는 나에게 치어리더 같은 친구였다. 힘든 생각들이 나를 엄습해 와도 카밀라와 시간을 보내면 나도 모르던 나의 자신감과 의욕이 불타올랐다.
카밀라 같은 친구를 옆에 두는 건 행운과도 같은 일이었다. 멋진 사람이기에 모두가 그녀와 친구가 되길 원하지만 진심으로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일은 매번 일어나진 않으니까 말이다.
내가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떠난 이후 유에유에도, 카밀라도 그 도시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로 향했다. 텍사스와는 멀리 떨어진 북쪽에 있는 주들로 그녀들은 이사를 떠났다. 카밀라는 미네소타(Minnesota)로 유에유에는 오하이오(Ohio)로.
지금도 종종 우린 영상통화를 하며 근황을 묻는다. 모두 새로운 정착지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적응하려 애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매번 통화하며 하는 말이 있다면, 누구를 만나든 너네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텍사스에 처음 와서 나는 또 다른 카밀라와 유에유에를 찾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는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유일무이한 존재들이기에 그 누구도 그녀들을 대체할 순 없기 때문이다. 이를 깨닫는데 6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보냈던 시간들에 대해 글을 쓰면서 향수병이 찾아왔다. 이상하게도 내가 태어나 30년 넘게 자라온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의 나의 첫 정착지인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곳에서 만났던 인연들에 대해 더 애틋했고 그 시간들을 너무 그리워하는 나머지 텍사스에서의 새로운 삶을 괴로워했다.
그래서 나는 지난 연말, 다시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방문했다. 아직 남아있는 친구들이 몇 있었기에 그들을 만나 회포를 풀고 자주 가던 카페와 상점, 여행지들을 다녀왔다. 그러고 나니 그곳을 떠난 후부터 줄곧 느껴지던 커다란 구멍 하나가 메워진 기분이었다. 새로운 나라에 와서 처음 머물렀던 도시에 애착이 형성됐나보다. 그건 그 도시가 미국에서 살기 제일 좋은 곳이라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유대감, 애틋함이 고스란히 그 도시에 남겨져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어디서 살든 가장 중요한 건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