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발가락 사이 모래알
만남
내가 엘리를 처음 만난 건 ESL 수업에 갔을 때이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든 생각은 '바비인형이 살아 움직인다'였다. 큰 키와 작은 얼굴, 그 작은 얼굴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 그리고 환한 미소까지 눈에 띨 수밖에 없는 외모를 가진 친구였다. 마마시타(Mamacita) 자체였다. 이 단어를 내게 알려준 건 엘리였다. 마마시타(Mamacita)란 스페인어로 '매력적인 예쁜 여자'를 뜻한다고 한다.
당시 나는 외국인과 이야기하는 것을 낯설어하고 두려워하던 때였다. 그렇게 소심하게 교실 구석에 조용히 숨어있던 내게 그녀는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다. 그녀는 나의 첫 번째 콜롬비안 친구가 되어줬다. 우리는 수업이 끝난 후에 스피킹연습을 더 하자는 핑계를 만들어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는 스피킹 연습을 할 수 있는 질문들을 구글에서 찾았다. 질문들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나 취미, 일과 같은 정보뿐만 아니라 가치관에 관한 질문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우리는 매일 3개~5개 정도의 질문들을 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신기했던 점은 당시 우리 둘 다 영어스피킹 실력이 서로 의사소통 하기엔 다소부족한 상태였는데도 마치 서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듯 찰떡같이 알아듣고 공감했다는 것이다. 언어로 100퍼센트 소통할 수 없지만 서로의 영혼이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경험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봤다. 나중 이야기지만 엘리가 말하길, 그녀는 나를 처음 봤을 때 한눈에 자신의 친구가 될 거라는 걸 알아봤다고 한다.
그녀는 겉으로는 외향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부끄러움이 많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데 소극적인 친구였다. 내가 왜 그녀에게 예외적으로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엘리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었는데, 이 도시로 이사 온 후 자신에 집에 친구를 처음 초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가 나를 자신의 특별한 친구인 것 마냥 표현해 주는 것이 나는 기뻤다. 엘리와의 관계를 통해 나는 처음으로,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아도 보자마자 나의 친구가 될 것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관계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가 내게 남기고 간 선물
그녀는 미국에서의 낯선 환경과 문화에 대해서도 나에게 많이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우리가 만난 도시로 이사오기 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다른 지역에서 10년간 살았는데 남편이 콜롬비안 아메리칸이라서 미국 문화에 나보다 익숙했다. 미국에 와서 맞이하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 때 그녀는 자신이 호스트가 되어 크리스마스 파티를 주최했다. 자신의 가까운 콜롬비안 친구들과 우리를 초대해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 엘리네 집에 도착해 문을 여니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어글리 스웨터를 입고 우리를 맞이해 줬다. 나는 그전까지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때 어글리 스웨터를 입고 파티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당연히 평소처럼 몸매가 부각되는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었을 것이라고 예상하며 문을 열었는데 눈사람이 그려진 스웨터를 입고 있는 엘리를 보며 잠시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다. 그녀의 파티에 참석한 90% 사람들은 모두 스페인어가 모국어인 친구들이었다. 그 사이에 낀 동양인 부부 때문에 그들은 모두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써야 했는데 이를 불편해하지 않고 반갑게 우리를 반겨주었다.
엘리 덕분에 나는 스페인어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녀에겐 10살 딸과 6살짜리 아들이 있었는데 학교에선 영어로, 집에선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덕분에 엘리네 집에 갔을 땐 그들이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따라 하기 쉬워 보이는 문장이 들리면 뜻도 모르고 그들을 따라 하곤 했는데 그 모습이 웃겼는지 엘리는 종종 스페인어를 내게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녀 말로는 나의 스페인어 발음이 미국인들이 스페인어를 쓸 때보다 훨씬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늘지 않는 영어 때문에 영어에 싫증이 나던 참이었는데 친구를 통해 배우는 스페인어는 신기하고 재밌었다. 그렇게 스페인어는 내가 태어나서 자의적으로 처음으로 배우고 싶은 언어가 됐고 꾸준히 공부하려고 노력 중이다. 가끔은 그녀의 아들 니콜라스가 나의 스페인어 선생님을 자처해 여러 가지 단어를 알려줬는데 니콜라스를 통해 스페인어로 색을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엘리와 대화하며 나는 자연스럽게 콜롬비아의 문화와 더불어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들에 익숙해지게 됐다. 특히나 그녀의 고향은 살사댄스의 고장인 '칼리(Cali)'였기에 그녀의 집엔 늘 라틴 음악이 흐르고 틈만 나면 친구는 스텝을 밟았다. 나에게 살사댄스를 가르쳐주려고 부단히 애를 썼지만 몸치인 나에겐 그 어떤 좋은 선생님도 소용없었다. 콜롬비아 사람들은 다 춤을 잘 추냐고 물어보니, 엘리 말로는 그건 가족의 분위기가 어떤가에 따라 달려있다고 했다. 춤을 좋아하는 가족 구성원이 많으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고 했다. 그녀는 살사 외에도 남편과 바차타를 추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둘이 춤을 추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그녀의 집은 무대가 됐다.
엘리는 남편과 결혼 11년 차이지만 그들의 눈에서는 아직도 꿀이 뚝뚝 떨어진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은 아이들에게 달려가기 전 엘리에게 먼저 다가와 입을 맞추고 인사를 한다. 나는 어떻게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서로를 바라볼 때 그런 눈빛이 나올 수 있는 거냐고 물었다. 그녀는 부부라도 여자와 남자로서의 설렘을 단 몇 퍼센트라도 남겨놓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아직도 나는 그 퍼센티지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분명한 건 그녀와 그녀의 남편 사이엔 아직도 로맨틱한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종종 이렇게 그녀는 나에게 언니로서의 조언을 아끼지 않았는데 결혼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새댁에게 그녀의 조언은 종종 유용한 팁이 되었다.
엘리는 내게 콜롬비아의 술 문화도 알려줬다. 엘리네 집에는 온갖 종류의 술이 있었고 누구보다 칵테일을 잘 만드는 훌륭한 바텐더, 엘리의 남편이 있었다. 콜롬비안들도 한국인들처럼 밤새 술을 들이붓는데 꽤나 일가견이 있었다. 심지어는 술을 마시기 위한 음악이 따로 있었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들이 흘러나오다가 엘리가 특정 단어를 외치면 지금이 술을 마시는 타이밍이 됐다는 걸 의미했다. 그녀는 내게 데낄라를 맛있게 먹는 법들을 전수해 줬는데 한 번은 둘이서 데낄라 한 병을 다 마시는 통에 둘 다 다음날까지 숙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후로 나에게 데낄라는 엘리를 상기시키는 술이 되었다. 엘리 덕분에 미국에 온 후 첫 2년 동안 한 순간도 외로울 틈이 없었다.
헤어짐
너무도 갑작스럽게 우리에게 이별이 찾아왔다. 적어도 4년 이상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머무를 예정이었지만, 남편이 학교를 옮기게 되면서 텍사스로의 이사가 결정됐다. 엘리에게 처음 말했을 때 그녀는 굉장히 안타까워했다. 나 역시 엘리와의 헤어짐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같은 미국땅에 있지만 가족과 심지어 아이들까지 있는 엘리가 집을 떠나 나와 시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기 때문에 더 그러했다. 이번에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더 우리를 애틋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만날 때마다, 헤어짐을 언급할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만큼 그동안 모든 속이야기를 서로 나눴던 우리였기에 그 빈자리가 어떨지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헤어짐이 다가오니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각별한 사이였는지 새삼 자각하게 됐다.
엘리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오히려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속 이야기를 훨씬 더 편안하게 털어놓았던 것 같다. 때론 가족에게도, 남편에게도 하지 못할 말 못 할 고민들까지도 말이다. 엘리 앞에서는 흔히 한국인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체면을 생각하지 않아도 됐고, 내 다른 관계들과 엮일 일도 없었기에 그녀 앞에서는 더 솔직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말을 가려서 할 필요도, 과장하거나 완화시켜서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나보다 몇 해 더 많은 인생을 살았던 엘리는 내게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문화 속에서 자란 그녀가 해주는 이야기는 나의 관점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기도 했다.
우리는 천천히 서서히 멀어지는 헤어짐을 택했다. 여기서 더 가까워진다면 헤어질 때의 타격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 엘리가 내게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조금 서운하기도 했지만 이내 그녀의 이별방식을 받아들였고 덕분에 너무 힘들지 않게 이별을 해나갈 수 있었다.
떠나기 몇 주 전, 나는 그녀의 집에 이틀간 머물며 그녀의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김밥 만드는 법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며 함께 요리도 하고 함께 공포영화를 보며 평범한 일상을 공유했다. 아이들은 김밥 재료로 플랜테인(채소처럼 요리해서 먹는, 바나나 비슷한 열매)을 넣거나 피시핑거를 넣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렇게 나는 그들에게 한국의 요리 하나를 전수해 주고 왔다.
마지막 주말엔 남편과 함께 엘리네를 방문해 늘 그랬던 것처럼 같이 맛있는 음식도 먹고 콜롬비아 보드게임도 하며 자정이 넘어서 새벽 2시가 될 때까지도 그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날이 마지막 날이란 걸 알기에 엘리의 아이들도 늦은 시간까지 우리와 함께 게임을 이어갔다. 게임을 멈추면 이제 우리를 보내줘야 한다는 생각에 니콜라스는 계속해서 "한번 더"를 외쳤다.
이제 정말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됐을 때 엘리의 딸 오드리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애써 웃어 보이며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는 길, 언제 다시 그들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내 인생에서 이런 종류의 이별이 있었던가. 아마도 처음이었던 것 같다.
문화와 국적이 다르고 언어가 달랐지만 우리는 친구가 됐다. 하지만 '다름'의 장벽이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언제까지 우리를 묶어줄 수 있을까 불안해졌다. 이 애틋함이 당분간은 우리의 우정을 지켜주겠지만 서로의 생활이 바빠지고 누군가 안부를 묻는 노력을 놓아버린다면 이 행복했던 기억은 그저 기억 속에만 묻히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난다.
진정한 우정은 그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꽤나 어려운 일이지만 지속성은 또 다른 문제인 것 같다. 특히나 우리를 묶어주는 공통분모가 같은 국적, 문화권, 학연, 지연 같은 것들이 아무것도 없다면 말이다. 너무 소중한 인연들을 만났다. 하지만 이번에 겪었던 이별을 통해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이 특별한 우정이 한낱 신기루가 되지 않길 이 우정들은 진짜였음을 증명해내고 싶다. 한국에서 살 때 생각해보지 않았던 '관계'의 정의가 미국에 살면서 점점 더 확장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