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때때로 부모님들
5월 8일이 끝나기 몇십 분 전, 오늘은 어버이날이자 할아버지의 첫 기일이다. 귀갓길에 어머니께 먼저 전화를 드리고, 퇴근길이라 말씀드리니 통화 말미에 물을 잘 챙겨 마시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최근 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저런 생각에 걱정이 많아 내색을 하지 않고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앞으로도 건강하셨으면 하는 바람이 반, 걱정되는 마음이 반, 그런 혼란 속에 시간이 늦은 줄 알지만 전화를 드렸다.
식사는 잘 챙겨드시는지 여쭈니, 혼자 지내는 사람이 어떻게 잘 챙겨 먹겠느냐고 반문하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혼자 산다고 그러시는 게 어딨느냐고, 더 잘 챙겨드셔야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더니 안 그래도 이웃아저씨가 가져다준 반찬에다 국을 끓여드셨다고 답하신다. 나보다 더 잘 챙겨드시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건강도 많이 나아지셨다고 하니, 내 마음도 좀 놓였다.
참 무뚝뚝하고 어색한 부자 사이, 나에게 아버지는 매번 ‘복잡한 사람’이다. 자식 된 도리로 문안인사를 드리는 게 천륜이 맞지만, 나에게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줄어든 시간, 즉 모래시계의 연한 역시 하나의 동인으로 작용한다.
부정적 연쇄반응, 악감정과 마이너스의 체인은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가 결단하는 순간에만 멈춘다. 그것이 상대적이든, 자기 생각이든, 설령 실제라고 해도. 그것을 실천하도록 만들어주는 여러 동인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중 하나는 아버지라는 ‘사람’, 그의 인생에 관한 생각도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10년도 더 전에, 그러니까 20대 후반 시절 나를 낳으셨으니 얼마나 앳되셨을까- 이 놀라움이 요 몇 년 사이에 머릿속에서 빙빙 돌곤 하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살았다’고, ‘그게 그냥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고 퉁치기에는 그 시절에도 무책임한 사람, 나쁜 사람 등등 온갖 인간군상이 있었을 까닭에- 그간 내 기준에서 섭섭이고 온갖 걸 다 떠나서, 나를 지금에 이르는 삶을 시작하도록 해주셨고, 천둥벌거숭이 시절부터 부양해 주신 것을 기억하려 애쓴다.
어떻게 보면 한 명의 사람으로서 아버지를 생각하는 셈인데, 그렇게 앙금에서 헤어 나와 객관화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게 정점을 찍었던 건, 바로 작년 5월 8일-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찾았던 백병원 장례식장에서였다.
어둑어둑한 밤, 장남이신 아버지와 다섯 동생 모두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되어 앉아계셨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아버지가 기운이 없어 보이셨다.
마지막까지 할아버지의 빈소를 지켰던 가족은 할머니와 여섯 자식, 맏손자인 나, 그리고 나의 여동생뿐이었다. 할아버지께서 훌륭하신 분인지 아닌지, 내가 장손인지 아닌지 보다도, 사실 내가 그곳에 계속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컸다.
사흘을 함께 보내며 내가 본 모습은 그랬다. 다섯 동생에게 맏이인 아버지는 우유부단하며, 요샛말로 ’호구‘같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급할 때 돈이며 뭐며 빌려주고는 맏이라서, 또 원래 성격이 무던해서…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곤 속앓이를 했던 것이다.
과연, 그렇게 잘난 체 하며 아버지를 이용했던 숙부들의 삶은 어땠을까? 일찍이 해외로 이민 간 다섯째 숙부를 제외하면, 다들 집이 썩 화목해 보이지 않았다. 숙모며 손자손녀들이 아예 빈소를 찾지 않은 집도 있었고, 내 바로 밑에 사촌동생 첫째와 둘째 역시 여수에서 급하게 와서는,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작별을 고했다.
효도라고는 못하겠고, 나와 내 가족은 그런 ‘불행에 대한 저마다의 이유‘로 구질구질하지 않으려- 아니, 그렇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에 그 자리를 스스로 선택으로 지켰던 것 같다.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비슷비슷해 보인다는 앞구절(인 것)처럼.
그래서였을까, 사실 빈소에서나 입관 전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에도, 운구 후 서울 추모공원에 도착할 때까지 이렇다 할 감정 변화나 기복이 없었다.
10년 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를 생각해 보았다. 나의 외가 친척들은 여느 집 비교해 볼 필요도 없이 참 화목하고, 외할아버지께서도 나름 장수하신 편이었는데- 장의차 기사님이 출발 직전 ‘무엇이 급하다고 일찍 가셨느냐고’ 위로와 안녕을 고하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었다. 장의차 조수석에 앉아서는 혼자 그렇게 울었었다.
그로부터 10년이나 훌쩍 지나기도 했고, 앞서 적은 것처럼 집안 꼴?도 어지간했으니 동요가 없는 건지 싶었다. 차례를 기다리던 끝에 화장장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외할아버지, 할아버지라는 사람과 이제 정말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거구나. 이제 영원히 이별해야만 하는구나.
부족했던 것들, 잘못한 일들이 있을수록, 다른 누군가에게 더 친절해질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조금씩 더 마음을 열고, 말도 안 되는 일, 내 기준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모순, 과거의 나라면 용서하지 못했을 것을 하나둘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어쩌면 영영 멀어진 사람들에게 풀지 못한 미안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을지로3가와 백병원을 지날 때, 양재를 거쳐 나갈 때, 그리고 그때 을지로에서 샀던 새 구두를 보면서 나의 할아버지, 그리고 나에게 찾아왔던 감정이며 기억을 되새김질해본다.
나의 할아버지들을 생각하면, <굿‘바이 : Departure>(2008)와 <도쿄타워>(Tokyo Tower : Mom and Me, and Sometimes Dad, 2007), 그리고 <부산행>(2016)이 떠오른다. 하나같이 참 ‘모자란 아버지들’ 투성이인 영화인데, 여기에 더불어 극 중 가족의 ‘죽음’이 가장 큰 사건으로 다가오는 까닭에 더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건 속에서 변화하는 건 (아버지=부모님의) 죽음을 대하는 나, 정확히는 ‘그들보다도 모자란 나’라서.
- 2024. 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