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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훈 Nov 23. 2023

통증에 대한 근대적 개념의 성립

통증기능분석학회 추계강좌

얼마전 서울 성모병원 대강당에서 통증기능분석학회에서 주최하는 강연에서 발표했던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통증치료 분야의 의사들을 대상으로 "만성통증 증후군, 세 번째 화살의 비밀"이라는 주제로 90분간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만성통증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있으실 것 같아서 강연의 요약본을 공유합니다. "만성통증은 일종의 감정 패턴"이라는 리사 팰드먼 배럿 교수의 연구를 임상에 적용하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그에 더하여 감정과 자아에 대한 관계를 최신 심리학과 뇌과학, 다양한 영적 전통에서의 경전들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심리학과 뇌과학, 영성이 높은 심층종교가 가리키는 한 지점이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높은 의식을 가진 이들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고통의 본질에 다가가면서 개인적으로 해 온 마음공부의 내용을 최대한 알기 쉽게 추가하였습니다.



(리사 팰드먼 배럿 교수는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정신의학과 의사이자 심리학자, 신경과학자입니다. 그녀는 미국국립보건원에서 뇌와 감정에 대한 획기적인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파이어니어 어워드 NIH Director’s Pioneer Award를 수상했습니다. 하버드의대 ‘법·뇌·행동센터 The Center for Law, Brain & Behavior’의 수석과학책임자 CSO이기도 한 그녀는 심리학 및 신경과학 분야의 혁신적인 연구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과학자 중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신경과학자입니다.)



총 13편의 글을 통해 알아볼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만성통증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통각이 통증으로...)

2. 서로 다른 자아, 서로 다른 통증

3. 만성통증 증후군의 치료 (치료자의 의식과 환자의 회복)

4. 순수의식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치유



만성통증을 치료하시는 분, 만성통증으로 고통받는 분들께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의과대학에서 배우는 생리학과 신경과학 만으로는 만성통증의 실체에 가깝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저도 평생을 약물과 주사, 도수치료, 물리치료, 운동치료 등의 몇 가지 해결책을 가지고 고통받는 환자들의 깊숙한 그곳에 다가서지 못한 채 서성이게 될 뻔하였습니다.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제대로 된 길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부디 의사도 환자도 세 번째 화살의 비밀을 확연히 보고 고통 없는 삶을 사시기를 응원합니다.






통증기능분석학회 추계 학술대회 강의록 초록



만성통증 증후군, 세 번째 화살의 비밀(1)


- 행복한재활의학과 김정훈



만성통증 증후군은 3개월 이상 지속되는 통증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이때 삶의 질과 직결되는 항목으로는 수면장애, 피로, 우울감, 자존감 저하, 업무의 능률 저하 등이 있다. 결국 만성통증 증후군은 다방면에서 한 개인의 자립 기능뿐 아니라 사회적 기능을 떨어뜨리고 이것은 환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과 사회의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만성통증 증후군을 해결하는 것은 개인의 통증을 제거하는 것을 넘어 그 가족을 치유하고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라고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는 만성통증 증후군은 치료보다는 치유에 더 가깝다.


그러나 만성통증 증후군을 해결하는 것은 전통적인 통증 치료 접근법으로 쉽게 해결되기는 어렵다. 일반적인 통증과 달리 만성통증 증후군은 근골격계의 해부학적 손상보다 반복되는 미세손상과 만성적인 염증이 더 큰 문제가 된다. 그뿐 아니라 통증에 대한 개인적인 관점, 사회경제적인 문제, 정서적인 문제 등이 복합되어 전통적인 주사치료나 약물치료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접근하는 것은 불완전한 회복이나 대단히 제한적인 결과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현대의학이 만성통증 증후군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모두가 Cartesian카르테지안(데카르트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식 생물학적 통증모델,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17세기, 데카르트는 중세시대와 확연히 비교되는 독창적이고 통합적인 시각을 가졌다. 사물의 이치에 대한 깊은 탐구로 데카르트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모든 사물의 이치에 있어 신을 중심으로 이해하던 시대를 끝내고 드디어 인간의 이성이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는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마지막 중세인이자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통증에 대해서도 이렇게 물리적으로 이해한 것이 통증의 생물학적 모델의 기반이 되었다. 이런 방식의 인체에 대한 접근은 외상이나 기형과 같은 해부학적 이상이 동반된 상황에서는 상당히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는 해부학적 이상이 동반되지 않은 통증이 훨씬 더 많다. 수많은 기능성 통증과 신경계에서 발생하는 통증에 대해서는 그의 통증모델이 별다른 해답을 줄 수 없음에도 현대식 교육은 여전히 그가 주창한 통증모델을 기반으로 교육하고 있다. 말초신경에서 통증을 조절하려면 국소마취, 척추 수준에서 통증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척추마취, 뇌의 수준에서 통증을 제어하려면 전신마취를 하는 방식이다. 급성 통증에는 이런 단계적 모델이 유용하지만 만성통증은 또 다른 이야기다.





데카르트 같은 천재의 말이라도 당대에만 유용하거나 특정 상황에서만 진실이다.


데카르트가 인간의 본질을 이성에서 찾았기 때문일까? 현대사회는 이성적 인간을 이상적 인간이라고 믿는 사회적 통념이 생겼다. 감정은 이성의 반대편에 위치한 수준 낮은 그 무엇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최근 행동심리학이 밝힌 것처럼 인간의 행동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뇌에서 추론하거나 비교 판단하는 이성적 사유가 아니라 상당 부분 감정이었음이 데이터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데카르트식 통증모델이 우리 사회를 압도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마음과 몸을 둘로 나누고 몸은 철저히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원칙을 따른다고 믿었다. 통증에 대한 그의 관념도 마찬가지다.


"자극이 크면 조직 손상이 크고

조직 손상이 크면 통증이 크다.”


너무도 자명해 보이는 이 말이 오늘날 만성통증을 만들고 있는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한 심신이원론의 함정이다.


문명화된 사회는 지난 100년간 통증 분야에서 엄청난 진보를 이루었다. 세포와 유전자의 구조를 밝혀냈고 수많은 신경전달물질과 뇌의 상호작용을 파헤쳤다. 마취기술과 인공관절, 장기이식기술 등이 발달하여 어려운 수술도 가능해졌고 심지어는 로봇이 정교한 수술을 하기도 한다. 통증을 조절하는 약물과 세포재생기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상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의학적인 발전의 혜택을 누리는 선진국은 왜 여전히 100년 전 정도의 의학 수준을 가진 후진국에 비해 만성통증 환자가 더 많을까?




다음 시간에는 급성통증이 만성으로 진행하는 과정을 알아보자.



- 1/13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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