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의사의 환자일기 시리즈
폭행으로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극한 고통 속에서 OOO님은 용기를 내주었다.
부정적 상황이 주는 감정적 충격에 끌려가지 않고 감정을 마주보는 힘이 생긴 것이다.
우리는 연결되었고 삶은 우리를 통해 흐르기 시작했다.
치료하는 주체와 치료를 받는 객체가 따로 있지 않다. 나와 OOO님은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드라마의 각본과 연출은 삶 그 자체이다. 나는 이 드라마를 기획하지 않았다. 물론 OOO님도 이런 드라마에 본인이 출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이 드라마가 내 불안에 물든 기억을 따라 호러물로 끝날지 한 편의 동화같은 해피엔딩으로 끝날지 약간의 선택은 할 수 있다. 매번 선택의 순간마다 불안에 물든 내 기억을 붙들지 않는 것이 삶이 연출하는 이 드라마를 즐기는 유일한 길이다.
회복한 뒤 다시 서울로...
참담한 기억이 채 아물지 않은 2023년도 9월 중순부터 정체되었던 치료가 조금씩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 차례 치료를 거듭하면서 고관절의 힘줄염이 좋아졌다. 그러니 넘어지는 횟수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가장 큰 수확은 OOO님 본래의 밝은 감정이 자주 나타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참 잔정이 많고 밝은 에너지가 있는 분이라고 느꼈었다. 좋은 게 있으면 나눠주기 좋아하고...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배려하는 누군가에게 무척이나 고마워하고... 참 밝고 좋은 분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런 모진 시련을 겪다니...
치료가 어느 정도 진전을 보이던 날 내게 책을 한 권 선물하셨다.
바다를 사랑하는 작가가 참으로 감성적으로 쓴 책이었다.
모든 삶은 흐른다.
이 책의 제목처럼 이미 삶은 우리를 관통하여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가끔씩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중 내가 의도한 것이 얼마나 될까 궁금한 적이 있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만난 부모님과 선생님과 친구들... 나의 아내와 아이들... 심지어는 내가 의과대학에 들어간 것 조차 백퍼센트 내 뜻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태어난 곳의 사정과 문화에 따라 나는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때의 상황에 따라 내 의도가 조금 반영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내 앞에 펼쳐진 엄연한 현재가 생생하게 사실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생생한 드라마의 주인공인 내가 과연 이런 스토리를 연출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어쩌면 나는 주어진 인연 안에서 소소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너무도 생생한 '나'라는 느낌을 가진 그 무엇이 살아가는 이 공간과 시간을 연출하는 총감독은 누구일까?
어쩌면 삶, 그 자체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지도 모른다.
나는 예전에는 '삶'(또는 생명 Life)이라고 부르는 이 총감독을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누군가는 '영성'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불성'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참나' 또는 '본바탕'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초월의식'이라는 다소 모호한 말을 쓰기도 한다.
이름이야 어쨌든지 김정훈이라는 개별적 이름을 가진 '나'라고 불리는 오래된 기억이 이 드라마의 총감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OOO님이 주신 책의 제목은 나의 의식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거의 한 달간의 집중치료 후에 이제 왠만큼 불안하지 않을 정도로 걷게 되었다.
OOO님은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대로 자연스럽게 회복되어 다시 보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런... 재발이라니...
그런데...
서울로 간지 두 주가 지났을까... 다시 메시지가 왔다.
그토록 바라지 않았던 재발이 왔다.
OOO님)
안녕하세요.
불행하게도 다리가 또 그렇게 되어 보행이 어려워요.
주사나 재활치료로는 이제 못하는 거지요?
첫 번째 치료가 마무리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발을 하고 나니 재활치료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을거라고 지레 판단하신 것 같다. 사실 다시 서울로 올라가실 때도 완전한 확신은 들지 않았다. 100점 만점에 70점 정도? 그래도 이만큼 빨리 다시 재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
저런 ㅠㅠ
골절만 아니라면 가능할 거에요.
그나저나 대구에 그렇게 길게 또 내려와 계실 수 있을까요?
지난 번에는 한 달 이상 대구에서 치료를 하면서 겨우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데 이번에야 말로 내려오시면 완전히 회복시켜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는 분인데 회사에서 이렇게 긴 휴가를 또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짧은 치료, 그리고... 또 다시
예상대로 OOO님은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내어 다시 치료를 시작했다. 몇 번의 치료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거동이 조금 가능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서울로 다시 보내며 마음이 지난번처럼 흔쾌하지 않았다.
아쉽고 불편했다.
수술을 할 만한 상태는 아니라서 대학병원을 보내기도 어렵다. 이런 분들은 대학병원에서 MRI와 같은 온갖 검사를 다 하고도 수술할 상황이 아니라면 몇 달치 약만 받아서 오는 일이 많다. 아니면 정형외과, 신경과, 재활의학과, 류마티스내과.. 때로는 정신과까지 여러 과들을 전전하다가 스스로 지쳐서 나가 떨어지기 일쑤다.
아니나 다를까...
서울로 간 지 얼마되지 않아서 또 다시 메시지가 왔다.
OOO님)
현재 몸 상태가 죽도 밥도 아니라 사직서를 냈습니다.
워커 보조기를 샀어요.
거동 연습 후 안정화되면 내원하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나는 메시지를 며칠이 지난 뒤 확인하고 얼른 답장을 했다.
나)
제가 넘 늦게 메시지를 보았네요.
많이 힘드셨겠네요. ㅠㅠ
충분히 회복하실 겁니다.
가능하십니다.
체력도 회복하시고 다시 빛나는 모습으로 회복하실 거예요.
다음 주 오시면 자세히 진찰하고 최선을 다해 치료하겠습니다.
사직서까지 낼 정도면 매우 어렵거나 확실히 해결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 같다.
회사를 그만 둔 것은 속상하지만 이렇게 찔끔찔끔 치료받으면서 힘든 상황이 이어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잘 된 것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치료하고 잘 마무리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서울로 가시도록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