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3년
아빠가 돌아가시고 우리에게 남은 것들에 대하여.
가족이지만 살갑지 않았던 부녀사이. 아빠는
유능했지만 딸에겐 그 이상의 아버지도 아니었다.
그렇게 돌아가시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오래도록 좋아하시던 바다 앞 아파트는 부동산침체기에 급매로 내놓았고(엄마가 아빠의 짐을 끌어안고 사셨고, 물건 하나하나에 깃든 아빠의 흔적에 눈물을 흘리셨다.
퇴직하시고 아빠는 그 큰 집에서 절반이상의 공간을 자신의 연구실로 꾸몄다.)
리모델링 한번 안 한 그 집은 오로지 풍경만으로 빠른 시일 내 주인이 나타났고. 내가 사는 근처로 집을 구하고, 마지못해 엄마는 아빠의 짐을 고대로 들고 이사 오셨다. 이삿날 아이들 때문에 내가 버릴 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엄마는 많은 짐들 들쳐 매고 오셨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고 곧 아빠가 돌아가신 기일이다. 그 후로 5월은 가정의 달이자 이별의 달이었다. 아빠가 남겨둔 과학자의 흔적들은 버리지 못하고 일부는 손자들의 장난감으로, 일부는 창고에, 또 어떤 의미 있는 것들은 필요한 곳에 보내기도 했다.
나는 그런 것들에 의미를 두는 것이 생에 큰 가치가 있는지 싶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죽고 나면 싹 비우고
가볍게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엄마는 여전히 손자들에게 남겨 줄 무언가를 찾고 계신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부터 한 달에 한번 정신과 의사를 만난다. 우리 아빠보다 한참 중후한 주치의.
여든에 가까운 백발의 주치의에게
한 번은 시어머니에 대해 이번엔 친정엄마에 대해
때론 나에 대해 길지 않은 시간 상담을 한다.
의사는 하루에 다양한 연령대와 상담을 할 것이고 그 내공 덕분에 의사의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믿게 되었다.
늘 그 말씀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은
아빠가 돌아가실 때 아빠에 대한 서운함과 슬픔을 잘 해석해 주셨기 때문이다. 좋은 의사는 나에게 맞는 처방을 해주시는 사람이란 걸 정신과의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물러서지 못하고 버틸 힘이 없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니 욱한다고 주변어른들과 싸울 생각하지 말라고 늘 하셨다.(한마디 하고 곧 후회하고 관계회복을 위해 또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한 달에 한번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다. 그렇게 지난 3년을 잘 지냈다. 버틴 게 아니라 일상을 가볍고 편안하게 보냈다.
사실 엄마에게도 살갑지 못한 딸이다. 같은 아파트에 계셔도 자주 가지 않고,
연락하실 때만 잘 받는 편이다.
그 사이 엄마는 무릎 수술을 서울대병원에서 했고
3개월 혹은 6개월에 한 번씩 우리는 서울에 올라가서 긴장과 두려움을 가지고 삶의 소중함을 배우러 간다.
우리에겐 서울은 그런 곳이다. 아빠가 진료받지 못한 곳, 그래서 부산에서 할 수 있는 수술을 내가 굳이 서울로 모시고 갔고 말없이 엄마도 따라온 곳,
검진을 위해 서울에 갈 때마다
100년 된 도가니탕집에서 의식을 치르는 곳.
그때만이 아이들 없이 엄마와 함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눌 수 있는 곳..
함께 창경궁을 걷고
아빠 추억을 이야기하고
손주들 자랑을 하며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통로.
아빠 덕분에 엄마와 나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조금씩 노력하는 지금 이 시간이 쌓여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고
우리 가족도 행복했노라고, 고마웠다고
우리 이렇게 잘 지낸다고 곧 아빠를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