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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itor 흰둥 Mar 11. 2020

#13. 잊지 못할 그 날_첫번째

그날이 왔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날.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주인공이 되는 날. 둘이 하나 되는 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 기타 등등 어떤 한 단어로도 표현이 되지 않는 감동적인 그날이 왔다.



다행히 오후 예식이라 새벽같이 일어나는 여타 신부들에 비해 아침잠을 좀 더 만끽하고 느지막이 눈을 떴다.


일어나서부터 제일 먼저 체크했던 건 거울 속 나의 모습. 혹시 어디 뾰루지가 난 건 아닌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오래 지속되는 베개 자국이 생긴 건 아닌지 유심히 살펴봤다.


다음으로 날씨 확인하기. 일주일 전부터 계속적으로 지켜봐 왔던 오늘의 날씨는 변덕쟁이 사춘기 소녀와도 닮았었다. 오락가락하는 일기예보와 나날이 심해지는 미세먼지 탓에 며칠 전부터 내심 노심초사했었다. 역시나 약간의 잿빛 하늘을 띄고 있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샵 도착 직전, 갑자기 어디선가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우르릉 쾅쾅. 제발 천둥소리만큼은 아니길 바랬지만...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리 적이 없다. 차 유리창에 또르르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내 마음도 같이 울었다.


모든 여자들은 공감할 것이다. 비가 오면 열심히 공들인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이 반항한다는 사실을. 생에 제일 예쁘게 보이고 싶은 이 날 헤어와 메이크업이 말썽을 부린다면 너무 슬프지 아니하겠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식장까지 가는 길, 새하얀 드레스가 빗물에 자국 나지 않을까 걱정도 될뿐더러 무엇보다 먼길 달려오는 하객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생기게 된다.


한창 메이크업을 받고 있으니 신랑이 도착했다. 그는 나보다 한 시간 가량 뒤에 도착할 것을 권유받았다. 물론 함께 와서 기다리는 착실한(?) 신랑들도 존재했지만, 하루 종일 고생할 그에게 좀 더 아침잠을 즐길 수 있는 마지막 휴식(?)을 줬다.



이날 피부 표현에만 한 시간 가량을 쏟는 엄청난 메이크업(이라 쓰고 분장이라 부른다)에 또 한 번 감동받았다. 지난 가봉 스냅 때는 좀 더 짙고 화려하게 메이크업을 했다면, 이번에는 자연스럽고 깨끗한 분위기에 초점이 맞춰졌다.


헤어스타일은 깔끔하게 묶는 로우 번 스타일로 정했었지만 가르마를 두고 한차례 깊은 고민에 빠졌었다. 정 가르마냐 올빽이냐. 결정 딜레마에 빠진 나 대신 헤어 실장님의 빠른 판단력으로 정 가르마가 선택되었다. 비바람에 맞설 강력한 스프레이 분사도 빠지지 않았다. 단 한가닥의 잔머리도 용서치 않겠다는 의지!


드레스로 환복하고 최종 헤어/메이크업 점검을 받았다. 화사한 조명, 큰 거울 앞에서 난생처음 보는 나의 모습에 심취했다. 평상시 화장을 안 하고 다니는 사람도 아닌데, 역시 전문가는 달랐다. 비싸다고 생각했던 메이크업 비용이 합리적인 소비였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이제는 식장으로 출발할 시간. 이 순간 잠시 잊고 있던 긴장이 올라왔다. 두근 거림 반과 초조한 마음이 묘하게 뒤섞여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분을 안고 식장으로 출발했다.


도착서부터는 정신이 없었다. 식장 직원들의 꽃 세례를 받으며 입장한 후,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입꼬리가 떨리고 바짝 쪼여진 드레스에 숨쉬기도 쉽지 않았다. 바싹바싹 말라오는 입 안에 물줄기 공급이 시급했지만, 드레스 차림으로 화장실을 가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해 참았다.


일찍 달려온 친구들, 사진작가님, 헬퍼 이모님 모두 옆에서 “예쁘다”를 끊임없이 연발하며 황홀한 공주의 세계로 빠지게 했다. 어쩌면 이미 빠져있는 나를 더욱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때문이었을까. 언제 긴장했냐는 듯, 세상 즐기며 촬영하고 있는 나에게 이모님은 이런 신부 처음 보았다며 함께 즐거워하셨다.


신랑은 나와 다르게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사진 촬영이 끝나고, 리허설까지 완료된 후 신랑과 나는 각자의 위치로 이동했다. 그는 식장 입구, 나는 신부대기실. 나 또한 입구에 서 있고 싶었지만 이 날,  이 순간만큼은 세상 우아한 요조숙녀처럼 대기실에 앉아있어야 했다. 이것이 신부의 세계.


물론, 나는 우아함 대신 세상 해맑은 신부였다.


떨리던 입꼬리는 이제 고정이 되었다. 수많은 셔터 소리와 “축하해” “예쁘다” 외치는 달달한 멘트들은 나를 더욱 이 분위기에 심취하게 만들어줬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분위기였지만 반전의 시간은 존재했다. 친정 엄마와 사진을 찍는 순간. 울어서 비싼 메이크업이 날아가는 일이 없게 하자고 서로 약속했었지만 엄마와 마주 앉는 순간 울컥함이 올라왔다.


“울려면 예쁘게 우셔야 해요. 그래야 사진에 잘 나온답니다” 외치는 작가님의 말씀에 아차차 정신 차리고 최대한 드라마 속 여주인공처럼 우아하게 눈물을 훔쳐 닦았다.




약 30분가량 있었던 대기실에서의 체감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이 기분, 이 순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지만 분침의 흐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빠르게 흘렀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제는 유부녀로 가는 공식 첫걸음마를 떼야할 시간이 되었다.


입장 준비!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드디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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