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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소 중

시작하며

by 이영

2024년 1월 29일 해고예정통보를 받았다. 명백한 부당해고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5인미만 사업장이라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억울하고 분했다. 하지만 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냥 잊고 잘 살려했다. 당시 나는 수익형 블로그를 키우고 있었다. 이제 한 달 뒤면 월급이 끊긴다고 생각하니 블로그를 키우는 데 더 몰두하게 됐고, 정신없이 글을 쓸 때면 진짜 내 바람처럼 다 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딱 그때뿐이었다. 노트북을 닫는 그 순간부터 머릿속은 다시 억울함, 자책, 수치심, 모멸감 등 일일이 알아채기도 힘든 여러 감정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몸에도 증상이 나타났다. 척추를 따라 뜨끈하고 따끔한 열기가 뇌로 올라갔다. "(머리) 뚜껑 열린다"는 관용구는 진짜였다. 머리에 뚜껑이 있었다. 가슴에서 올라간 열이 머리 뚜껑을 열어젖히고 심장이 귀 옆에서 쿵쿵거려 잠을 잘 수 없었다. 이 화를 식히기 위해 그 추운 겨울밤 날마다 공원에 가서 달렸다. 달리다 감정이 북받치면 나무를 붙잡고 엉엉 소리 내 울기도 했다. 그럼 잠시 괜찮아졌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어느새 내 몸은 또다시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스크린샷 2025-01-12 오후 2.27.40.png 사자가 포효하듯 분노가 포효했다 (c)pixabay


어느 대체의학에서는 풀리지 않은 화가 몸 어딘가에 남아있다 결국 자신을 공격해 관절염을 일으킨다고 한다. 이 문구를 읽는 순간, 예전에 인상 깊게 보았던 한 방송 장면이 떠올랐다. 관절염으로 손이 변형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삐쩍 말라 있었고 모두 선해 보였다. 물론 기력이 없고 아파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평생 화 한 번 안 냈을 것 같은 순한 인상이 대체의학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 느껴졌다.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 나도 나중에 관절염으로 고생하면 어떡하지? 모든 병의 원인으로 스트레스가 빠지지 않는데 이 증상이 관절염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다른 병을 부르면? 부당해고 당한 것도 억울하고 분해서 미치겠는데 이것 때문에 병까지 생기면 화를 못 풀어낸 내가 병신 같고 혐오스러울 것 같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분노가 나에게 향했다. 나중에 나를 더 미워하지 않으려면, 후회하지 않으려면 뭔가 해야 했다. 잊는 건 그 방법이 아니었다.


그제야 고소를 했다. 두 번이나 성추행을 당하고도 괜히 회사에 말했다가 해고될까 봐 무서워서 말하지 못했었다. 다만 두 번째 추행을 당한 뒤 가해자에게만 문자를 보냈고, 결국 이 문자 때문에 가해자와 그의 최측근에 의해 그토록 두렵던 해고를 당했으니 이젠 신고를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고소를 하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했다. 두 주 동안 밤을 꼴딱 새울 만큼 화병으로 고생한 뒤에야 비로소 경찰서를 찾았으니 말이다.


신기하게도 경찰서에 가서 고소한 그날부터 화병 증상이 사라졌다. 이후 1년 동안 싸우면서 (아직도 결론이 안 났다) 나 자신에 대해 돌아봤다. 어쩌다 이렇게 근로기준법 적용도 못 받는 사회 최하층이 된 건지, 왜 불쾌한 일을 당하고도 아무 말도 못 했는지, 왜 그렇게 고소하는 게 겁이 났는지 말이다. 그리고 법의 세계에 대해서도 약간 알게 됐다. 이것들을 글로 풀어내려 한다. 이 작업이 나에게는 완전한 치유가, 이 글을 읽는 분께는 필요한 도움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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