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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성추행 신고하지 못한 이유(2)

파견직의 서러움

by 이영

전 직장은 사무실이 따로 없었다. 이 모임과 관련있는 다른 단체의 어느 부서 책상 하나가 내 자리였다.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지만 나만 다른 곳 소속이라는 점에서 파견직과 비슷하다. 이곳에서 2018년 1월 1일부터 2024년 2월 29일까지 시간제 정규직으로 근무했다.


입사초기, 파견직의 설움을 느끼는 일이 두 번 있었다. 엘레베이터에서 내려 사무공간에 들어오려면 출입 카드를 찍어야 했다. 그런데 한 달 넘게 출입 카드를 받지 못했다. 아무리 요청해도 알겠다는 대답뿐이었다. 출근할 때, 화장실에 다녀올 때 등 잠긴 문 앞에서 누군가 지나가길 하염없이 기다리다보면 내 처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회사 직원이라면 출입카드는 기본인 건데 나는 그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어느 날은 출근하니 인터넷이 안 됐다. 알고보니 회사 전체에 인터넷을 바꾸면서 내 자리만 누락된 거였다. 이런 전체 시스템에 관련된 사항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없었다. 내 자리가 있는 부서에서 챙겨줘야 했지만 실수인건지 일종의 텃세인건지 몇 주 전부터 차근차근 진행되던 일을 나만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날벼락을 맞았다.


이론적으로는 나를 거기 앉혀놓은 전 직장이나 책상을 내어준 관련 단체에 필요한 부분을 요청할 수 있고, 그들은 해결해줘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출입 카드나 인터넷처럼 업무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에서조차 나는 소외됐다. 이후 부서 담당자가 바뀌면서 이런 기본적인 문제는 더 이상 생기지 않았으나 입사 초기에 겪은 이 일은 현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나는 두 곳과 관련 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 어려웠다. 그래서 성추행 피해 신고를 하는 게 더 망설여졌다.


면접을 볼 때, 전임자는 3달도 못 버티고 그만뒀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도 이 곳에 취업하기전 구직 스트레스로 공황발작을 겪지 않았다면 이렇게 급여도 적고, 단지 그 자리에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눈치가 보이는 환경에서 근무하지 않았을 거다. 이땐 몰랐다. 나는 매일 조금씩 위축되며 나 자신을 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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