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의 역사 6] 조선사 최고의 천재군주, 의문의 죽음 전말
#. 아래 내용은 2024년 4월에 출간된 '암살의 역사' 서두 부분.
"이날 유시(酉時)에 상(정조)이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다. 앞서 양주와 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이 났다." -정조실록 中
조선사에서 가장 훌륭한 임금을 꼽으라면 대개 '세종'과 '정조'가 거론된다. 세종이 조선 전기에 국가를 진흥시켜 단단한 기틀을 다졌다면 정조는 조선 후기 국가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두 임금이 수많은 치적을 남겼다는 점에선 비슷하지만 성장 배경과 정치적 환경은 매우 상이하다.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태종은 가혹한 숙청 등을 통해 세종이 마음껏 정치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줬다. 그 어떤 신료도 감히 태종의 아들인 세종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조는 아니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영조의 미움을 받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으며, 정조 자신은 죄인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썼다. 시작하기도 전에 수많은 쇠사슬이 정조를 휘감았다. 왕이 되는 것 자체도 힘들었지만 왕이 되고 나서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신료들이 정치적 대척점에 있었고 노골적인 반감을 표출했다.
그럼에도 정조는 세종과 같은 성군 또는 명군의 반열에 올라섰다. 매우 영민했던 그는 각종 개혁정치를 선보이며 정국 주도권을 장악해 갔다. 나아가 조선을 '근대화'의 길로 이끌었다. 전 세계적으로 일렁이는 근대화의 물결에 조선도 발맞춰 나가는 형국이 조성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국가의 미래가 밝아 보였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정조 사후에는 되레 퇴행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에 당대 및 후대의 사람들은 정조가 오래 살지 못한 것에 대해 실로 원통해했다. 이러한 마음은 정조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바로 '정조 암살설'이다. 당대에 행해졌던 의료 처방과 미심쩍은 정국 구도 등에 기반해 암살 의혹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일각에서는 암살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우리들은 그 진위 여부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원통한 마음이 배어있는 암살 의혹을 통해 정조의 개혁정치와 죽음 등이 갖는 역사적 무게감이 막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도 정조의 삶과 죽음은 역사가들은 물론 모든 이들이 천착할 주제일 것이다. '조선사 최고의 천재군주', 정조의 드라마틱했던 개혁정치와 의문의 죽음 전말을 되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