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의 역사 7] 국권 피탈과 급서 전말
#. 아래 내용은 2024년 4월에 출간된 '암살의 역사' 서두 부분.
"한진창 씨는 광무태황제(고종)가 독살된 게 틀림없다고 믿고 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이렇다.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다.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황제의 이는 모두 구강 안에서 빠져있고 혀가 닳아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30cm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 등과 함께 염을 행한 민영달씨가 한 씨에게 이 상세한 내용들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 中
정조 사후 내리막길을 걸은 조선은 19세기 중후반부터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다. 해외 열강들이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중 이웃나라인 '일본'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노골적인 야욕을 드러내며 조선을 공략했다. 일본의 조선 침략 역사를 살펴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다. 집요하고 잔인한 방법을 총동원해 마수를 뻗쳤다. 한없이 미약했던 조선은 일본에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해보고 속절없이 당했다. 치욕적인 '국권 피탈' 폭풍은 조금의 자비도 없이 매우 가혹하게 휘몰아쳤다. 결국 대한제국의 모든 주권은 일본에게 넘겨지고 말았다. 대한제국 백성들은 졸지에 망국의 백성들이 됐다. 사실상 마지막 군주인 '고종'의 처지는 비참해졌다. 폐주가 됐고 구석진 곳에 유폐됐다.
고종은 국권 피탈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의 여러 실정들이 불행한 결과의 원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다만 고종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다. 나름대로 일본에 용감히 맞섰고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 측면이 있다. 그 당시 존재감 만으로 나라를 잃은 백성들에게 큰 위안이 되기도 했다. 백성들은 고종이 생존해 있는 한, 아직 '완전한 국권 피탈'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머지않아 완전한 국권 피탈이 이뤄지고 말았다. 고종이 급서 한 것이다. 마지막 군주를 잃은 백성들은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그러면서 석연치 않은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고종 암살설'이다. 이는 여러 정황과 증언들로 인해 당대는 물론 현재에도 설득력 있게 회자되고 있다.
기실 암살설 논란에는 백성들의 설움과 분노가 고스란히 투영돼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3.1 운동'이라는 거국적인 민족운동이 발생했다. 3.1 운동은 왕정이 아닌 민주 공화정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으로도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고종의 죽음과 암살설은 민족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건들의 도화선 역할을 한 셈이다. '나라를 빼앗긴 비운의 군주', 고종의 국권회복 노력과 의문의 죽음 전말을 되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