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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sha May 11. 2023

나무 되기 연습


 소녀는 메말랐지만 스산하지는 않은 초겨울 산길을 한 걸음씩 걸어간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상쾌한 호흡을 같이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닥에 어질러진 회색빛 나뭇가지들 사이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 한 소년을 발견한다. 소녀는 걸음을 멈춘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야?” 소녀가 묻는다. 소년은 당황했지만 한쪽 눈만을 뜨며 귀찮은 듯 “나무가 되는 연습을 하는 중이야.”라고 말한다.  소년의 시선이 하늘을 향하며 풍성하지만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의 중앙에서 해가 빛을 발하는 것이 보인다. 그 빛은 따스하면서도 쓸쓸하다.  소녀도 소년의 옆에 나란히 누워 나무가 되어보려 한다. 소년과 소녀의 숨소리만 나직이 들린다.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어느 단편 만화에서 보았던 장면이다. 단지 내 기억 속의 짜깁기 스토리 일지도 모르지만, 한창 사춘기의 답답하고 예민했던 시기에 이 만화를 본 후로 숨을 쉬고 싶을 때 또 위로받고 싶을 때, 학교  뒤에 있는 산에 가서 나뭇가지들을 모으곤 했다.

나무가 되는 연습을 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부러진 가지와 나뭇잎들 위에 털썩. 누웠다. 교복 재킷을 돌돌 말아서 베개로 삼고 잠시 눈을 감고 있었더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눈을 뜨고 하늘을 쳐다보니 높은 나무들이 해를 가려주고 있었다. ‘나무들은 이렇게 평생 하늘과 땅만을 바라보며 햇살과 비를 기다리는구나’ 생각했다.

외롭겠다 싶었을 때, 살랑거리는 바람이 얼굴에 불어왔다. 추워지겠다 싶었을 때 흙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심심하겠다 싶었을 때 숲 속의 온갖 소리들이 들려왔다. 잎 새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바람이 새처럼 나무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소리. 곤충들 소리. 새소리. 그  소리들에 집중하다 보니 잡생각들이 날숨으로 빠져나가는 동시에 신선한 공기가 들숨으로 들어와 비워진 머릿속을 채웠다. 처음 들렸던 내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음악 같은 그 소리를 한참이나 듣고 있으니 나무가 되는 거,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갑자기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 벌떡 일어났다. 검은 교복에 덕지덕지 나뭇잎과 흙먼지들이 붙어 있었다. 여러 번 탈탈 털고도 흙먼지가 남아있는 걸 보았을 때, 엄마의 폭풍 잔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다. 오늘도 혼나겠구나. 초보 나무에서 말썽꾸러기 인간으로 급히 변신하며 터덜터덜 산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동안은 잔소리 듣지 않는 나무가 부러웠다.
 
 그 후로 몇 번을 더 가 보려고 했지만 그저 나무들을 관찰하고 해를 보며 바람만 느끼고 올뿐 나무가 되는 연습은 하지 못했다. 잔소리가 무서웠을까. 불량 청소년이라는 오해를 사기 싫어서였을까. 그저 답답할 때면 산을 보며 산 바닥에 누워 있는 상상만 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다.


산 입구를 들어서며 숨을 크게 들이쉰다. 상쾌하다.

가끔은  나무가 되고 싶다. 숲이 되고 싶다. 주고, 주고 또 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그 나무들이 사는 숲. 그곳은 안식처가 있다.  동물들이, 곤충들이 사람보다도 더 빨리 알고서 집을 지어 살고 있다. 산속은 시골의 할머니 댁처럼 포근하게 감싸주며 언제 가더라도 아무런 말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어 좋다. 가만히 서서 숨을 다시 한번 크게 들이마시며 적어도 올해의 목표는, 나무가 되는 연습을 하는 두 번째 걸음으로 모종을  몇 개 심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다음 발걸음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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