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교육"의 직무를 유기한 어른들
베어타운 (프레드릭 바크만 作)
삼월 말의 어느 날 야밤에 한 십 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것은 어쩌다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베어타운>은 첫머리는 위와 같은 말로 시작된다. 시작부터, 총이 개입된 십 대 청소년과 누군가의 갈등을 예고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프레드릭 배크만이 전작인 <오베라는 남자>,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브릿마리, 여기 있다>에서 일관되게 유머스럽고 따뜻한 이야기를 써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소설은 낯설다. 프레드릭 배크만 특유의 소소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사랑한 이들에게는 실망감이 들 수도 있고, 신선함에 기대감이 들 수도 있다.
제목인 <베어타운>은 십 대 청소년이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산탄총의 방아쇠를 당긴 사건이 일어난 마을의 이름이다. 베어타운의 현재 상황은 좋지 않다. 일자리와 인구는 해마다 줄어가 마을 전체가 쇠퇴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런 베어타운 주민들이 재기의 희망을 찾는 곳이 바로 "하키 아카데미"이다. 준결승까지 오른 청소년팀이 우승만 해준다면, 시의회에서 베어타운에 "하키 아카데미" 유치를 결정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각지에서 하키를 배우기 위해 베어타운을 찾을 것이다. 유입되는 인구만큼 경제가 살아나는 것이라는 희망을 먹고 베어타운 사람들은 현상황을 견디며 살아간다.
마을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보니 베어타운의 주민들은 하키에 대해 광적인 집착을 보인다. 결과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어른들은 청소년 하키팀의 작은 비행이나 일탈은 눈감아주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 속물근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당히 이용한다. 수업을 땡땡이쳐도, 대마초를 피워도 "절대 하키팀에서 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처벌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왜냐? 어른들 역시 그들이 필요하니까.
어른들의 이런 태도는 아이들에게 "나쁜 일을 저질러도 된다"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었고 그것이 한 가정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비극"을 낳는다. 마을에서 성폭행 사건이 일어나고, 가해자로, 하키 청소년팀 소속의 선수, 그것도 하키 천재라 불리며 베어타운의 위상을 높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한 소년이 지목되었다. 하키에 미친 어른들은 급기야 피해자를 가해자로,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들기까지 한다. 베어타운의 이름을 더럽힌 소녀를 "관종" 정도 혹은 "짝사랑한 상대에게 원망을 품어 무고한 사람에게 성폭행범 누명을 씌운" 혹은 "자기가 원해서 즐겨놓고 이제 와 딴소리하는 걸레"라 부른다.
소녀는 이름을 잃어버리고 인격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이제 그녀를 "그 애" 혹은 "나쁜 년", "걸레"라고 부른다. 책을 읽으면서, 마을 사람들에 의해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에게 가해지는 2차, 3차의 폭력을 지켜보는 것이 더 마음이 아팠고 나를 분노하게 했다. 성폭행은 전적으로 하는 사람의 잘못이다. 이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베어타운에서는 모두들 피해자의 행동에서 귀책사유를 찾기 급급하다.
"네가 걔를 좋아하지 않았니? 술을 그렇게 마시지 말았어야지? 걔를 따라서 2층으로 올라간 건 너 아니야? 옷을 야하게 입었던 건 아니니? 네가 조심했어야 하는 것 아니니?"
베어타운의 사람들은 열다섯 살의 피해자를 가해자로 모는 죄를 자행한다. 우리 사회가 그렇듯 말이다.
베어타운의 사람들은 성폭행 사건으로 마을 전체가 뒤숭숭한 분위기에 빠진 상황에서도 "하키" 걱정만을 한다.
"우라지게 부끄러운 일이야. 그런데 나는 하키단이 걱정이 돼. 거의 칠십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한 구단인데 내년에도 그럴 수 있을지 잘 모르겠거든. 아이가 유죄로 판명이 나면 사람들이 하키 탓을 할까 봐 그게 걱정스러워. 전부 하키가 뒤집어 쓸까 봐."
나는 이 소설이 "성폭행"의 피해자가 쏟아지는 비난과 그들이 겪어야 하는 사회적 소외를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아이들 교육"이라는 직무를 유기한 어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경기 전, 긴장된 분위기를 푼다는 목적으로 라커룸에서 아이들은 외설적인 농담을 한다. 게이, 레즈비언, 빈곤층, 인종에 대한 차별적 발언들이 오고 가지만, 코치도, 그 어떤 어른도 그것을 말리지 않는다.
결국에는 다비드(청소년팀 코치) 마저 미소를 짓는데, 그는 나중에 이 순간을 숱하게 돌아볼 것이다. 농담은 농담일 뿐인지, 이건 너무 도가 지나쳤는지, 라커룸 안과 밖은 다른 원칙이 적용되는지, 경기를 앞두고 긴장을 풀고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라면 선을 넘어도 되는지, 그가 나서서 라르스를 막고 선수들에게 다른 이야기를 했어야 하진 않았는지. 하지만 결국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웃도록 내버려 둔 뒤 퇴근 후 집에 가서 여자친구와 눈이 마주치면 그때서야 비로소 이런 부분들에 대해 생각해볼 것이다.
소설에서는 베어타운에서 오랜 시간 술집을 운영해 온 라모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 아이들을 키운 장본인이 하키가 아니라 당신들이라는 걸 언제쯤 인정할래? 자기들이 멍청한 짓을 저질러놓고 자기들이 창조한 쓰레기 탓으로 돌리는 남자들은 어딜 가나 있다니까? 종교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다는 둥, 총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둥, 다 똑같은 개소리잖아!"
나는 자신들의 잘못을 하키로 돌리는 라모나의 말에 동의를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베어타운의 사람들이 하키를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바르게 지도하고 교육해야 하는 직무"를 방기하기 위한 핑곗거리로 삼았다고 보았다. '마을의 재기를 위해서는 하키가 필요하고, 우리는 하키에 집중할 수밖에 없어'라고 핑계를 대는 동안, 아이들은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지 못한 채 자라버렸다. 아이들 역시, 어른들과 같이, 사건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하키 영웅"에 대한 모함은 마을에 대한 도전이요, 배신이다. 하키에 대한 맹목적 지지가 결국 집단 광기를 낳았다. 거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는 물음을 독자에게 던져준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더욱 가치가 있다.
* 워낙에 등장인물이 많은 탓에, 앞부분이 지루하다고 하는 서평들이 있던데 개인적으로는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음. 얘기마다 개연성이 있고,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전체의 큰 물줄기로 잘 이어짐. 짜임새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