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의 종류가 이렇게 많다니
글을 쓰고 있다. 단편 소설이 되기를 희망하지만, 초보들이 그렇듯 잘 읽히고 싶은 욕심에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아진다. 죽기 전에 책 한 권은 내보고 죽자는 인생의 목표가 이뤄질 날은 전보다 더 요원해 보인다. 이럴 때 아쉬운 것이 역시 어휘력이다. 분명 이 구구절절한 마음을 한 단어로 간결하고 탁월하게 표현할 수 있을 텐데... 어휘력이 약해 상황 설명과 심리 묘사만 장황해진다. 특히 약한 것은 한자어. “어휘력이 약하면 생기는 일”이라는 제목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에피소드 속 문의자는 “자동이체 해지”라는 말을 떠올릴 수 없어, ‘매달 돈이 자동으로 빠져나가는데 이제 그만 빠져나가게 하고 싶다’는 긴 설명을 은행원에게 늘어놓아야 했다.
#유머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있는 그 인스타그램 피드를 그저 웃고 넘겨버릴 수 없었던 것은 글을 쓰면서 나도 나의 부족한 어휘력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 학원 국어 선생님이 한자를 잘 배워두라고 할 때, “우리나라말은 국어인데 왜 한자를 배워야 해요?” 하고 맹랑하게 대들며 잘난 척이나 하지 말걸. 당시에는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가 졌고 그가 옳았다. 역시 어른 말은 일단 잘 들어볼 일이다.
오늘 내가 표현하고 싶던 것은 이런 것이었다.
1.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준비했던 프로젝트를 A라고 지칭해보자.
2. A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변수 B를 만나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3. 상황은 이제 A 프로젝트를 언제 다시 재개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4. 수개월이 지나 B가 일어나기 전의 상태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돌아갈 수 없어졌고 A를 준비했던 시절을 회상해보니, 그때 A를 진행하던 시기가, 그 과거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5. 마치 그것이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꿈이었던 것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 말이다.
나는 딱 그 상황에 적확한 표현을 찾고 싶었고, 꿈의 종류에 대한 검색을 했다. 검색 결과로 길몽, 악몽, 예지몽, 자각몽, 태몽, 잡몽 (a.k.a. 개꿈)이 나왔다. 다 아는 단어들이었고, 그나마 잡몽이 근접하다고 우겨볼 여지가 있었지만, “개꿈”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고, 어쩐지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아 개꿈도 탈락. 그래서 선택한 차선책이 “잠”이었다. 그런데, 검색을 하고 보니 놀라웠다. 세상에 이렇게 잠을 지칭하는 말이 많은 줄이야....
잠을 정리해놓은 글은 페이지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끝이 났다. 모두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말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잠이 많을진대, 나는 그동안 단잠, 통잠, 꿀잠, 늦잠, 낮잠, 밤잠, 새벽잠, 아침잠, 선잠, 쪽잠, 새우잠만 자며 살았구나.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잠도 아는 종류만큼 잘 수 있는 것일까.
언어 결정론을 옹호하겠다는 마음은 아니지만, 어쩐지 표현하는 말, 어휘를 잘 알지 못하여서 충분히 그것을 즐기지 못한 시간들에 대해 억울한 마음이 든다. 길게 늘여진 잠을 지칭하는 단어들의 리스트를 보며 나는 이제라도 언어를 더욱 풍부하게 쓰고 싶고, 잠도 다양하게 자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가령, 오늘 근무 시간에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 남몰래 10분 동안의 짧은 수면을 취한 것을 수십 년간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쪽잠 아니라, 이제는 말뚝잠 (꼿꼿이 앉은 채로 자는 잠)이나 도둑잠(자야 할 시간이 아닌 때에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몰래 자는 잠)으라 말할 수 있기를.
매일 아침 알람을 10분 단위로 맞춰 놓고 깼다 잠들었다를 다시 반복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 나의 별남을 두고 “나는 알람을 열 개씩 맞춰. 일어나서 또 잘 때 되게 행복하다.” 가 아니라 “나는 평소 개잠(아침에 깨었다가 또다시 자는 잠)을 즐기는 편이야”라고 말하고 싶다.
예민한 편이라 내가 화장실 갈 때마다 자꾸 깨는 언니에게 “벼룩잠(깊이 잠들지 못하고 자꾸 자다가 깨는 잠) 자게 하여 미안하다.”라는 말을 건네고 것이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
고민해봤자, 내가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를 두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시린 눈으로 좀처럼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날에는, “어젯밤 걱정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라는 열일곱 글자 대신 그것에 반도 안 되는 “사로잠(염려가 되어 마음을 놓지 못하고 조바심하며 자는 잠)을 잤어요”라는 칠음절의 말로 나의 피로함과 긴장됨을 군더더기 없이 전할 수 있기를 나는 소망한다.
오늘의 익힌 단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여야 나의 잠으로 만들 수 있을까.
결국 나는 찾고 싶었던 그 단어를 찾지는 못했지만, 도리어 나는 많은 잠을 얻었다. 이전까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혹은 존재는 하지만 표현할 길을 몰랐던 수많은 잠들을 이제 나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오늘 내가 찾지 못한 그 단어를 찾기 위해 나는 앞으로도 계속 머리를 굴려야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단어 수집을 계속하다 보면 찾게 되지 않을까. 그래도 실패하면 그냥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뭐.
앞으로 다양한 잠을 향유하기 있기를 바라며 잠의 종류를 정리한다.
1. 깊이 든 잠
- 단잠 (아주 달게 곤히 자는 잠)
- 귀잠 (아주 깊이 든 잠)
- 속잠 (깊이 든 잠)
- 통잠 (한 번도 깨지 아니하고 푹 자는 잠
- 꿀잠 (아주 달게 자는 잠)
- 꽃잠 (1. 깊이 든 잠, 2. 결혼한 신랑 신부가 처음으로 함께 자는 잠)
- 쇠잠 (깊이 든 잠)
- 발편잠 (근심이나 걱정이 없어져서 마음을 놓고 편히 자는 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한잠 (깊인 든 잠)
- 단잠 (자다가 도중에 깨지 않고 죽 내처 자는 잠)
- 곤잠 (고단하여 깊이 든 잠.)
- 첫잠 (1. 막 곤하게 든 잠, 2. <농업> 누에가 뽕을 먹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자는 잠.
- 발편잠 (근심이나 걱정이 없어져서 마음을 놓고 편안히 자는 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 시각 또는 시기에 따른 잠
- 낮잠 (낮에 자는 잠/유의어 주침, 오침)
- 밤잠 (밤에 자는 잠)
- 늦잠 (아침까지 늦게 자는 잠)
- 일잠 (저녁 일찍 자는 잠)
- 새벽잠 (날이 샐 무렵 자는 잠)
- 아침잠 (아침에 늦게까지 자는 잠)
- 저녁잠 (초저녁에 일찍이 드는 잠 = 초저녁잠)
- 봄잠 (봄날에 노곤하게 자는 잠)
- 여름잠 (<동물< 열대 지방의 일부 동물이 여름철의 더위나 건조기를 피하기 위하여 여름철 일정 기간 동안 잠을 자는 일, 도롱뇽, 악어 따위의 소형 설치류에서 볼 수 있다)
- 겨울잠 (1. <동물> 같은 말 - 동면, 겨울이 되면 동물이 활동을 중단하고 땅속 따위에서 겨울을 보내는 일. 박쥐, 고슴도치, 다람쥐 따위의 포유류에서 볼 수 있으나 넓은 의미로는 곤충, 개구리, 뱀 따위의 변온 동물의 월동도 포함한다, 2. 발전이 없는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유의어 동면, 휴면)
3. 불편한 잠
- 겉잠 (1. 깊이 들지 않은 잠, 2. 겉으로만 눈을 감고 자는 체하는 일)
- 꾀잠 (거짓으로 자는 체하는 잠)
- 뜬잠 (밤에 자다가 눈이 떠져서 설친 잠)
- 선잠 (깊이 들지 못하거나 흡족하게 이루지 못한 잠)
- 수잠 (깊이 들지 않음 잠)
- 쪽잠 (짧은 틈을 타서 불편하게 자는 잠)
- 칼잠 (충분하지 아니한 공간에서 여럿이 잘 때 바로 눕지 못하고 몸의 옆 부분을 바닥에 댄 채로 불편하게 자는 잠)
- 풋잠 (잠든 지 얼마 안 되어 깊이 들지 못한 잠)
- 헛잠 (1. 거짓으로 자는 체하는 잠, 2. 잔 둥 만 둥 한잠)
- 노루잠 (깊이 들지 못하고 자꾸 놀라 깨는 잠)
- 갈치잠 (비좁은 방에서 여럿이 모로 끼어 자는 잠)
- 덕석잠 (덕석을 덮고 자는 잠이라는 뜻으로, 불편하게 자는 잠을 이르는 말)
- 도둑잠 (자야 할 시간이 아닌 때에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몰래 자는 잠
- 돌꼇잠 (한자리에 누워 자지 아니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자는 잠)
- 벼룩잠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자꾸 자다가 깨는 잠)
- 사로잠 (염려가 되어 마음을 놓지 못하고 조바심하며 자는 잠)
- 여윈잠 (흡족하지 못한 잠)
4. 자세와 관련된 잠
- 나비잠 (갓난아기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벌리고 자는 잠)
- 고주박잠 (등을 구부리고 앉아서 자는 잠)
- 말뚝잠 (꼿꼿이 앉은 채로 자는 잠)
- 개잠 (개처럼 머리와 팔다리를 오그리고 옆으로 누워 자는 잠)
- 시위잠 (활시위 모양으로 웅크리고 자는 잠)
- 새우잠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고 자는 잠)
- 앉은 잠 (앉은 채로 자는 잠)
- 꾸벅잠 (고개를 꾸벅거리며 조는 잠)
5. 기타
- 개잠 (아침에 깨었다가 또다시 자는 잠)
- 덧잠 (잘 만큼 잔 후에 또 자는 잠)
- 이승잠 (병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줄곧 자는 잠)
- 한뎃잠 (한데서 자는 잠)
- 다방골잠 (일요일이나 연휴에 늦게까지 자는 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