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모 가정 적응기
실화가 드라마보다 더 하다고 했던가. 다사다난했던 결혼 준비 과정, 남편 및 시댁과의 갈등, 스트레스로 인한 뇌경색, 이혼, 그리고 희귀병 진단과 수술. 한 사람에게 이렇게 극적인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드라마를 쓰면 아침 연속극이 될 것이고, 그 드라마가 방영된다면 "너무 막장이잖아!"라는 평을 받을 것이다.
낡은 건물이 있는 자리에는 새 건물을 지으려면 이전의 낡은 건물을 부수고 치우는 과정이 필요하듯, 나는 내가 의지했던 것들을 철저히 부서지는 가난을 경험했다. 내가 믿는 신이 내게 줄 영적인 풍요로움을 느끼고 보고 싶었다. 철거의 과정이 고통스럽고 괴로울수록, 신이 주는 위로와 평안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누구라도 거저 얻은 것에는 애착이 덜한 법이다.
비싼 값을 주고 얻은 물건은 그 값만큼 알뜰살뜰하게 취급된다.
- 양귀자 <모순> 중
이혼의 과정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삶을 내어 던져 나를 지키려던 내 어머니의 희생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두 번의 개두수술을 통해서 먹고, 걷고, 뛰는 평범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얼마 전 발간된 나의 책 '이혼 후 다시 웃다' 중 작가의 말엔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겪은 결혼생활, 이혼 과정, 삶과 내면의 이야기가 얼마나 공감이 될는지, 위로를 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이 책이 한 번쯤은 헤어짐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도, 이미 헤어짐을 경험한 사람에게도 들여다볼 만한 것이 되었으면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게 있었던 그 일들이 내게만 국한된 값진 경험은 아닐 테니까.
내가 내 이야기를 하는 이유이다. 내 어두운 면,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결코 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상처와 우울, 고통의 시간을 담담히 나누면서 이러한 경험들이 누군가에게 선용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 마음은 여전히 내 안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작년 한 해 내가 겪어냈던 많은 일들이 그저 행복과 감사를 느끼는 순간에도 불안함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평안히 지나갔나 싶은 하루에도 불현듯 나타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우울증, 이혼, 두 번의 수술, 권고사직과 퇴사, 가난 등. 이 중 한, 두 개 정도의 고난이 없는 삶은 없을 것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삶이 어두운 때는 분명 있었을 테니까. 나를 짓눌렀던 일들은 내 마음을 어지럽혔고 그것들이 무겁게 느껴졌다. 게다가 짧다면 짧은 일 년의 세월에 득달같이 한꺼번에 나를 덮쳤으니까 말이다.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배신감 또한 그 관계의 파괴,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삶 자체가 꺾였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삶은 지금껏 그랬듯이 내가 원하는 자유와 행복을 쉽게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묵묵히, 꿋꿋하게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있어야만 하는 것은 나만을 향해 있는 어떤 눈동자 때문이다. 삶을 감내하는 성장통을 겪으면서 난 생채기를 싸매기도 전에 해야 할 것은 내 아이를 지키고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이제 겨우 7살 된 딸은 나보다 의젓하게 '한부모 가정'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숨은 속내를 다 알 수 없지만, 딸이 보여주는 단단함은 되려 내가 배워야 할 점이 되었다. 때로는 지난날의 상처로 아파하는 내게 위로를 주는 딸아이가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그런 아이에게 얼마 전부터 성장통이 시작됐다. 삶의 성장통을 겪는 엄마, 신체의 성장통을 겪는 딸.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 성장이구나 싶었다.
얼마나 많은 성장이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겪고 있는 성장통이 꽤나 아파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게다가 밤마나 괴로움을 호소하면서 딸아이가 우는 통에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조차 어미로써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포털사이트에 '성장통 완화'를 검색하고 수많은 성장통 마사지 방법을 사용해 보았지만 일시적으로 완화될 뿐 밤마다 우는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그러던 중 평소 '금쪽같은 내 새끼'를 즐겨보던 편인데,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금쪽같은 내 새끼 56회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나는 '유아 야경증'에 대해 알게 되었다. 주변 엄마들에게 밤에 깨서 몸이 불편하다고 우는 건 성장통일 거라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에 아무 의심 없이 성장통일 거라고만 생각했고, 그래서 잠 못 드는 밤 딸아이 다리를 주물러주기만 했는데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알게 된 유아 야경증 증세가 딸아이가 밤마다 우는 양상과 더 닮아있었다.
유아 야경증은 잠이 든 후 1~2시간 사이에 발생하며 소리를 지르고 강한 동작을 한다고 했다. 딸아이도 잠든 지 꼭 1~2시간 안에 갑자기 울듯이 소리를 지르며 깨고, 발차기를 하거나 몸부림치기가 일쑤였다. 안아서 달래도 보고 토닥토닥도 해주었지만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으며 그저 스스로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 증상이 나타날 때는 이름을 불러도 듣지 못하는 아이 같았고, 행여나 나의 수술부위가 아직은 온전하지 않은데, 딸아이의 발에 차이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쉽게 다가갈 수 없을 때도 많았다. 수술부위가 잘못되는 게 무서워서 아이의 증상에서 한 발 피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생기기도 했으며, 용기 내서 아이의 다리를 붙잡으면 팔을 휘저었고 더 멈춤 없이 동작이 강해졌다. 삼사십 분을 소리 지르며 우는 통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은 무기력감도 나를 괴롭게 하는 일 중 하나였다. 당황스러운 것은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잠들곤 했는데, 그렇게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이 간밤에 행했던 일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단순 성장통의 일부라고 생각했는데, 유아 야경증이라니... 엄마들은 알아야 할 것이 많다더니 듣도 보도 못한 병명에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싶어 나의 검색어는 성장통 완화에서 유아 야경증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알게 된 사실은 유아 야경증의 원인이 불안감, 스트레스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아이가 갑작스레 야경증이 생겼다면 최근 변화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딸아이에게는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빠의 부재, 엄마의 병치레 및 수술로 인한 입원 같은 것들이 딸에게 큰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물론 내 수술로 인해서 1년간 휴직하며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아빠의 부재나 "엄마 아프니까 기다려, 참아, 안돼" 같은 외할머니의 말들이 아이에겐 견딜 수 없는 불안함을 안겨주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나 아빠가 24시간을 함께해도 아이들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딸아이는 갑작스레 아빠도 잃었고, 엄마가 수술을 한다며 병원에 가면 2~3주씩 집에 오지 않았기에 오는 불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본인이 씩씩하지 않으면 엄마가 더 맘 아파할 것이라는 생각에 딸은 그 모든 것을 밝고 명량하게 견딘 것 같다. 그 모든 감정들이 딸아이가 밤마다 소리치게 만들었고, 그 증상이 호전되려면 시간이 필요했으며 엄마인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불안함을 없애주려는 노력을 하는 것과 아이의 스트레스를 분출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이 전부였다.
아이와 살아가려면 휴직이 길어져선 안 됐다. 120만 원 남짓한 양육비로는 우리 둘이 살 수 없었고, 전남편은 그가 주는 아이의 양육비가 내게 조금이라도 사용될까 봐 노심초사했기에 내 꼴 잘난 자존심이 그 양육비로는 나에게 한 푼도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심어주었다. 나는 결국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일을 하러 가게 되면 아이가 겪을 불안함이 더 커질까 싶었고 그럼 다시 일하게 되기 전까지 아이와의 시간을 더 많이 보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딸아이가 겪는 성장통이 신체적 성장통이 아닌 나와 같은 마음의 성장통임을 알게 된 뒤 우리는 서로의 성장통을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함께 했다. 항상 나 혼자 가려던 내 친구들 모임에 친구들의 양해를 구하고 딸아이를 대동했다. 수술 후 급격히 체력이 떨어졌지만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놀았으며, 둘 만의 데이트를 자주 가졌다. 두 번째 수술이 끝나고 한 달 뒤인 10월부터의 일이다.
그렇게 딸아이의 야경증 증상은 호전되었고, 나도 행복하지만 불안함을 느끼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더블싱글의 삶에 적응해나가고 있었고, 그렇게 단단한 한부모 가정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