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레언니 Apr 23. 2024

선생님, 이젠 아빠가 없어요.

어린이집 선생님께 이밍아웃을 했습니다.

"선생님... 아실 수도 있는데 이제 저희 집엔 아빠가 없어요."



잘못한 것이 아닌데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괜히 애꿎은 티슈만 두 손으로 빙빙 돌렸고,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티슈 너머로 보이는 내 발 끝은 긴장이 서려 한껏 오므라졌다.








교회 유치부에서 "이제 아빠 같이 안 살아요." 하며 선생님들께 이야기한다고 들었던 터라 어린이집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빠가 같은 집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 2주에 한 번씩 아빠를 보러 간다는 것, 다른 친구들과는 가족의 모습이 조금 다르다는 것이 아직까지는 아이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듯 보였다. 나도 어린 시절(물론 현재 내 딸의 나이보다는 많았던 시기이지만)에 엄마의 이혼을 눈앞에서 보고 경험했기에 딸아이의 그런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당시에는 이혼이 그렇게 흔하지 않았었기 때문일까, 어쩌다 내가 엄마와만 산다는 것을 알게 된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곧 놀림감이 되곤 했다. 


"쟤 아빠 없대." 



이 말이 가슴 시리게 아팠던 적이 많기 때문에 내 이혼이 아이에게 줄 영향을 정말 많이 생각해 보고 또다시 고민하고 내 나름 오랜 시간을 혼자만 생각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이혼했다. 그렇지만 딸아이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남다른 것 같았다. 가끔 생각지도 못하게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라든지, "엄마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하고 말하는 딸아이가 나보다 더 어른스럽게 느껴지도 했다.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친정부모님의 손길이 많이 닿았기에 딸아이는 사랑을 듬뿍 받았다. 너무 감사하게도 이 못난 어미가 우울에 허덕일 때도, 신체의 나약함으로 병원 신세를 질 때에도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보다 더한 사랑을 퍼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밝고 명랑한 그 모습 그대로 자기의 뜻은 아니지만 변화된 가족 형태를 소화해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아이를 둘러싼 환경에 그 변화를 알리기를 두려워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때로는 '대행 서비스'를 포털사이트에 검색해보기도 했다. 어린이집에서 꽤나 활동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작년 어린이집 운동회는 갖가지 핑계를 만들어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숨긴다고, 피한다고 될 문제는 아니었다. 아이가 겪어야 하는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고 어떻게든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곤 했다. 







아이를 위해선 선생님께 이혼을 알리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지만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어린이집 상담기간에 전화 상담을 요청했다. 키즈노트에 전화상담을 하겠다고 댓글을 달고 몇 분 뒤 전화가 걸려왔다. 어린이집이었다. 한 번 크게 숨을 고르곤 전화를 받았다.


"어머님~ 전화상담 요청 주셨는데...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시간 되시면 방문해 주실 수 있나요?


딸이 어린이집을 5년째 다니고 있는데, 그중 4년을 한 담임선생님과 보냈기에 선생님과의 관계가 다른 아이들보다는 깊었다. 그러니 차마 선생님의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자는 그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어물쩍 대면상담은 어렵다고 말하는 나와 그래도 얼굴을 보고 대화하자는 선생님. 팽팽한 줄다리기는 결국 상담날짜를 잡고 나서야 끝낼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상담이 올 때까지 내 안에서는 반문하고 또 반문했다.


'나는 조금만 더 행복해지고 싶었던 것인데, 아니 더 이상 불행하진 않았으면 했던 것인데 그것을 위해 겪어내야 하는 여정과 상황들이 나를 더 괴롭게 하네. 과연 나는 잘한 것일까?




"종종 아빠가 집에 없다고, 같이 안 산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엄마랑 아빠가 친하지 않다고도 해요."




상담이 시작되고 10분 정도는 아이의 어린이집 생활 전반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그 웃음 많은 선생님에게서 웃음기가 사라진 순간 내게 들려온 말이었다. 역시나였다. 교회에서 보였던 모습 그대로 자기의 이야기를 전하던 아이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선생님... 아실 수도 있는데 이제 저희 집엔 아빠가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봇물 터지듯 참아왔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상담을 할 때 보면 거의 대부분의 싱글맘들은 아이에게 크나 큰 미안함과 죄책감을 보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미안함과 죄책감에 짓눌려 사는 엄마들도 흔치 않게 만난다. 그런 엄마들을 보면서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선택을 한 것이니 너무 많은 미안함을 가지고 아이를 대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한 적도 있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그것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미안함보다는 엄마의 아픔과 고통의 결과를 제 뜻에 의해서는 아니더라도 함께 나눠 짊어지어 주는 그 마음에 고마워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혼 사유와 가정의 모습을 쏟아낸 것은 아니지만 한부모 가족으로 살아가면서 아이가 겪어야 하는 많은 부정적인 상황들과 그것을 홀로 견뎌내야 하는 아이에 대한 걱정이 대부분이었다.






"어머님. OO이가 잘하고 있는 거예요. 스스로가 부끄럽게 여기고 숨기기보다 잘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빠가 같이 살지 않는다는 말도 웃으면서 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힘들면 힘들다고도 얘기해요. 어머님께도 어려워하지 않으면서 아빠 보고 싶다고 한다면서요. 아이 나름대로 제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머님의 걱정이 그 정도 크기가 아니어도 될 것 같아서 감히 말씀드려요. 그 힘듦을 제가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종종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이들 가운데에서도 부모의 이혼을 잘 알지 못하고 '아빠가 멀리 출장 갔다.', '아빠가 아파서 이제 집에 올 수 없다.'는 말로 일단은 숨기고 보는 가정이 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결국 아이가 알게 되는 순간에 겪는 그 허무와 분노는 숨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커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기에 나 또한 이혼의 과정에서 아이에게 이야기해 주었던 것인데 나는 무엇이 두렵고 떨려서 나만큼이나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많은 선생님께 알리기를 꺼려했을까. 내가 나의 이혼을 당당하게 여기지 못했나 싶었다. 내가 당당해야 아이도 당당 할 텐데 오히려 당당한 아이 앞에서 한 없이 작고 초라하게 어떻게든 숨겨보려 했던 모습이 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매년 5월이 오면 어쩔 수 없이 진행되는 가족 관련 수업들에서, 온 가족이 함께하는 운동회에서, 소풍에서... 어떠한 순간이든 아이가 상처받게 될까 봐 숨길 수 있으면 숨겨보려 했다. 그렇지만 어떤 순간이 아이에게 닥치더라도 남들과 다른 자기의 상황을 잘 받아들이고 그건 잘못이 아니라고, 누구나가 다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아이에게서 배워야겠다.


부족한 내게 억만금보다 더 귀한 자녀가 있다. 나를 웃게 하면서도 단단하게 올곧게 서 있는 7살. 물론 아이이기 때문에 어른스러운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 또한 떳떳해질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을 주는 그 아이가 오늘도 어린이집에서, 자신이 속한 어디에서든지 행복한 하루를 보냈으면 한다.



딸아, 올해는 운동회 가자!


   

이전 02화 면접교섭일은 왜 빨리 돌아오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